임진왜란을 계기로 종래의 궁시 위주의 전투로부터 새로 등장한 조총 등 화포 중심의 전투로 전쟁양상이 바뀜에 따라 궁시의 가치는 크게 하락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총을 한번 쏘는 동안 궁시는 여러 발을 쏠 수 있고, 비가 올 경우에는 조총의 사용에 많은 난점이 있어서 조총을 보완하는 무기로서 궁시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조선 후기의 군사가 삼수(三手)·속오제(束伍制)에 의하여 새로이 편제, 훈련되는 과정에서 중앙의 훈련도감 등의 삼수군 중 사수가 가장 늦게나마 편성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반면에 지방의 속오군에서는 삼수군 중 가장 손쉽게 충원할 수 있었던 사수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사수의 편제는 1대(隊)에 대총(隊總) 1인, 사수 10인, 화병(火兵) 1인으로 편성되었고, 포수를 전면에, 살수(殺手)를 후면에 두고 훈련 및 실전에 임하도록 하였다. 궁시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 장기로 전수되어왔던 까닭에 포수나 살수에 비하여 기예의 훈련이 덜 강조되었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래의 성곽에 의지하는 외적 방어전술이 조선 후기에도 유지되는 한편, 철전(鐵箭)·편전(片箭)·유엽전(柳葉箭) 등 여러 종목의 사예(射藝)가 무과와 군사 시취(試取)에 주요과목으로 존속되어 여전히 다른 무예보다 사예가 널리 보급,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