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서흥김씨삼강입정려(瑞興金氏三綱立旌閭)’라고도 한다. 1984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충신 김충수(金忠守)와 그의 아들 김함(金涵)이 지평(持平)으로 추증됨과 후손의 열부를 기록하였다.
1636년(인조 14) 김함의 손자며느리인 통덕랑(通德郞)과 김배(金培)의 부인 온양정씨(溫陽鄭氏)는 경기도 이천군 자래동에서 호란을 당하였다. 당시 슬하에는 어린 두 딸이 있었으며 정씨 또한 젊은 나이였다.
호적들의 침입이 이천까지 이르자, 정씨는 어린 딸을 등에 업고 큰 딸과 함께 집 뒤의 거마산(巨馬山)으로 피신하였으나, 적의 추적으로 수모를 면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정씨는 부도(婦道:아녀자의 도리)를 지키고자 어린 두 딸과 함께 절벽 아래 깊은 못에 몸을 날려 순절하였다.
이후 1700년(숙종 26)에 충수(忠守)의 증손인 후(垕)의 상서로 정려(旌閭:효자·충신·열녀 등을 기리는 문을 세워 표창하는 것)가 세워지고 1740년(영조 16)에 열부로 명정(命旌)되었다. 세 모녀의 무덤은 이천군 자래동 언덕에 일구삼총(一丘三塚)의 모양을 하고 있다.
김함의 6대손 통덕랑 김익성(金益聖)의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남편이 중병을 앓자 단지수혈(斷指輸血: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먹이는 것)하는 등 온갖 정성으로 간호하였지만 끝내 숨지고 말았다. 한씨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자식이 없는 까닭에 남편의 뒤를 따라 순절하였다.
1737년(영조 13)에 7대손 동현(東賢)의 상서로 열부에 명정되었다. 전후 100년에 절의(節義)가 상망(相望)하여 한 가문에서 충신과 효자 각 1명, 정절(貞節) 2명이 나왔고, 《삼강행실속록(三綱行實續錄)》에 기록되는 등 후세의 귀감이 된다.
김함의 효자정문은 원래 1606년(선조 39) 월래동(月來洞 :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에, 1737년에는 한씨 부인의 정렬정문(貞烈旌門)이 세워졌다. 1754년(영조 30) 증손 시집(時集)과 현손 순구(舜九) 등이 한 칸의 집을 개축하여 사면에 현판을 달았다.
당시 참판 민우수(閔遇洙)가 글을 찬(撰:기록)하고 정문(旌門), 현판(懸板), 음각(陰刻)은 생원(生員) 안상우(安相祐)가 기록하였다. 현존 건물은 1958년 고삼(古三) 저수지 관개공사로 응봉산(鷹峰山) 아래 네 칸으로 확장 이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