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묘역은 8만 7000여 평이며 이진봉(李陣峰)을 주산으로 하여 서남향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묘역 안에는 한산이씨삼세이하유사비(韓山李氏三世以下遺事碑)를 비롯하여 19위의 선조 묘와 신도비(神道碑) · 별묘(別廟) · 연지(蓮池) 등이 부설되었다.
이 비석은 현감을 지낸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한원군(韓原君)에 증직(贈職:죽은 후에 벼슬과 품계를 높여 주는 일)된 이장윤(李長潤)과 그의 아들로 선조(宣祖)의 훈봉(勳封:封爵과 贈職)을 받은 한성군(韓城君)이질(李秩), 이장윤의 손자인 순충보덕공신 정헌대부 이조판서(純忠輔德功臣正憲大夫吏曹判書)에 증직된 한평군(韓平君)이지숙(李之菽)의 유사(遺事:전해오는 일의 자취)를 후손 백천 군수(白川郡守) 이병연(李秉淵)이 찬(撰:기록)하고 진사 이기중(李箕重)이 전액(篆額:비석의 상부에 전서체로 글을 씀)하여 1728년(영조 4)에 건립하였다.
비 몸체는 285×80×26㎝으로 위에 팔작(八作) 지붕형의 가첨석(加檐石)을 얹었고, 받침돌은 127×84×43㎝으로 평면에 복련(覆蓮: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양각하고 4면에는 당초문(堂草文:여러 가지 덩굴들이 얽혀 뻗어 나간 모양의 무늬)을 조식하였다.
이증(李增, 1525∼1600)은 이지숙의 아들로, 자는 가겸(可謙), 호는 북애(北崖)로,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丙年마다 보던 과거의 문과)에 급제한 후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사건(鄭汝立謀叛事件)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정여립의 난을 평정한 22인의 공신) 3등에 책훈(策勳:공로자를 문서에 기록하는 것)되고 아천군(鵝川君)에 봉해졌다.
그의 신도비는 300×87×33㎝이나 대석은 140×93×60㎝의 장방형이다. 비문은 홍문관 대제학 정두경(鄭斗卿)이 짓고 글씨는 예조참판 이진휴(李震休)가 쓰고 이조판서 윤덕준(尹德駿)이 전액(篆額)하였다.
이경류(李慶流)는 임진왜란때 조방장(助防將) 변기(邊璣)의 종사관으로 상주(尙州) 전투에서 순국하여 홍문관제학에 증직을 받고 충신정문(忠臣旌門)을 하사받았다. 이경류정려비는 2개의 정방형 기둥을 세운 후 가운데 목재 현판(懸板)을 끼우고 팔작지붕형의 가첨석(뚜껑돌)을 얹은 독특한 양식이다.
비문에는 ‘충신 선교랑 수병조좌랑 이경류지려(忠臣宣敎郞守兵曹佐郞李慶流之閭)’로 되어 있다. 정려현액(旌閭懸額)은 75×37×9㎝이며 기둥은 176×34㎝이고, 가첨석은 240×109×55㎝의 크기이다.
이정룡(李廷龍, 1629∼1689)은 이경류의 손자로 아들 이택(李澤)의 현달(顯達:벼슬 · 명망 · 덕망이 세상에 드러남)로 증직을 하사받았다. 이정룡신도비는 350×88×31㎝의 크기이고, 대석은 150×99×53㎝이다. 삼세유사비 · 이경류정려비와 유사한 조형미로 보아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액(碑額)은 유명조선국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행통훈대부 행김제군수 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 이공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使五衛都摠府副摠管行通訓大夫行金堤郡守全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李公神道碑銘幷序)라고 명문이 있는데, 비문은 이의현(李宜顯)이 짓고 춘추관 편수관(編修官) 김진상(金鎭尙)이 쓰고 부총관(副摠管) 홍현보(洪鉉輔)가 전액하였다.
이오(李澳)와 이탄(李坦) · 이한(李漢) · 이병건(李秉健) · 이산중(李山重) 등의 묘는 혼유석(魂遊石) 1기, 상석 1기, 향로석 1기, 망주석 1기, 묘표 1기 등을 각각 배열하였다.
이오의 묘액에는 조선 통훈대부 부평부사 이공휘오지묘 숙부인 남양홍씨 부좌 숙부인 죽산안씨 부좌(朝鮮通訓大夫富平府使李公諱澳之墓淑夫人南陽洪氏祔左淑夫人竹山安氏祔左)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외에도 이증(李增) · 이장윤(李長潤) · 이질(李秩) · 이확(李穫) · 이집(李潗) · 이지숙 · 이정(李程) 등의 묘와 홍익한(洪翼漢) 아들인 홍수원(洪祔元), 이경류의 부인인 횡성 조씨(橫城趙氏) 묘가 있다. 또한 묘역 입구에는 한산이씨묘산입수비(韓山李氏墓山入首碑)와 동 · 서 · 북쪽에는 한산이씨묘경계비(韓山李氏墓境界碑)를 각각 설치하였다.
이 묘역은 조선시대 문중묘(門中墓)의 원형을 잘 보존한 형태이다. 묘역에 있는 금석문의 조형미와 형식 등이 16세기 이래의 묘제 변천사와 조각사를 잘 보여 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특히 이경류의 정려각은 목재 현판을 비신에 끼워 옥개형의 가첨석을 얹어 묘역을 보존한 매우 희귀한 사례로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