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헌종 6) 작. 흙벽에 채색. 너비 320㎝. 대웅전의 중앙 벽에 그려진 삼불탱화(三佛幀畫) 중의 하나로 비로자나불화(毘盧遮那佛畫) · 약사불화(藥師佛畫)와 함께 그려져 있다. 구도는 비교적 간단하여 아미타불(阿彌陀佛)과 4보살, 2비구 및 팔부신중(八部神衆)이 표현되어 있다.
원형 두광(圓形頭光)과 신광(身光)을 지닌 아미타불은 육계(肉髻)가 낮아져 둥글어지며, 정상 계주(頂上髻珠)는 생략된 반면 중앙 계주는 크게 표현되었다. 머리카락은 나발(螺髮)이다. 종래 윤곽선에만 나발이 표현되었던 것과는 달리 일일이 그려 마치 파마를 한 듯한 새로운 머리 모양을 보여 준다.
연꽃줄기 위에 활짝 핀 연화좌(蓮華座)에 앉은 아미타불은 신체 각 부분이 네모반듯한 모습이며 불안정해 보인다. 두 손의 모양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이다.
본존의 연꽃대좌에서 뻗어 나온 연꽃 위에 선 관음보살은 화불(化佛)이 새겨진 높은 보관을 쓴 백의관음(白衣觀音)으로 손에는 보병(寶甁)을 잡고 있다.
그리고 육중하고 장식이 화려한 보관(寶冠)에 보병을 새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연꽃송이를 들고 있다. 이 두 보살 이외의 보살은 합장을 하고 있다. 화면의 윗부분에는 아난(阿難)과 가섭(迦葉) 및 팔부신중이 표현되어 있다.
색채는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룬다. 하지만 녹색 계열과 흰색 등이 많이 사용되어 전체적으로 차고 푸르스름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18세기 전반기의 붉은색 위주의 부드러운 색조를 보이던 불화들과는 차이가 난다.
화기에 의하면 화원(畫員) 익찬(益贊) 외 10인이 공동 제작하였다고 적혀 있다. 익찬 등은 1831년 작 「아미타극락회상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제작에도 참여하였기 때문에 이 두 작품은 좋은 비교가 된다.
고려시대에 성행하였던 후불 벽화가 조선시대 후기에도 계속해서 그려졌다는 것을 알려 주는 예로서 중요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