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라 하였으며, 다리의 동쪽에 한석봉(韓石峯) 글씨의 비(碑)가 있다.
돌기둥과 노면(路面)이 맞닿는 부분에는 시렁돌을 철도의 침목처럼 올렸으며, 이 돌은 좌우로 거의 튀어나오지 않았다. 돌기둥 위에 마련된 노면에는 양쪽 가에 기다란 난간돌을 놓았고 그 사이를 여러 줄의 판석(板石)으로 깔았다.
노면 위에는 교량의 난간주 구실을 하는 돌기둥들을 3단으로 쌓았는데, 맨 아랫돌은 구형단면(矩形斷面)의 돌로서, 일정한 치수의 돌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중간돌 사이에는 각 돌기둥을 이어주는 8각의 돌을 꽂았고 맨 윗돌은 비석의 끝처럼 완만한 화강석을 사용하였다.
선죽교는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를 문병하고 오다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李芳遠)이 보낸 조영규(趙英珪) 등 4, 5인의 철퇴에 맞아 피살된 곳으로 유명하다. 돌다리에 정몽주 혈흔이 지워지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다.
주위에 두른 석란(石欄)은 1780년(정조 4)에 가설하였고 옆에 비각이 있는데 정몽주의 사적(事蹟)을 새긴 비석 2개가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