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천사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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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문신 · 학자 홍계희가 준천사(濬川司)의 사업내용을 기록하여 1760년에 간행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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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문신 · 학자 홍계희가 준천사(濬川司)의 사업내용을 기록하여 1760년에 간행한 보고서.
내용

1책. 목판본. 책머리에 임금의 어제서(御製序), 한성부판윤에게 내리는 교서가 있으며 그 다음에 준천사실과 준천사절목(濬川事節目)이 기록되어 있다.

한양에 재천도한 태종은 즉위 11년에 종래의 자연하천을 두고 어떤 구간은 종전 그대로, 어떤 구간은 하상(河床)을 파내고 하폭(河幅)을 넓혔다.

한편 제방을 쌓아 상류부분의 제방은 석축(石築)으로, 지금의 청계천 3·4가 구간에서부터 수구문(水口門)까지의 제방은 나무[木柵]를 설치하였으며, 또 대·소 광통교(廣通橋)·혜정교(惠政橋) 등 중요한 곳의 다리는 과거의 목교(木橋) 또는 토교(土橋)를 석교(石橋)로 바꾸어 개천공사를 하였다.

개천공사와 유지관리를 위하여 개천도감 등을 두기는 하였으나 도성안 주민들은 분뇨 등의 오물을 개천에 버렸고, 쥐·고양이·강아지의 시체를 비롯하여 유행성 열병으로 죽은 유아의 시체까지도 밤중에 몰래 개천에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 더욱 정도가 심해졌다.

이렇듯 개천에 대한 등한·경시는 개천에 오물·모래·자갈이 쌓이게 되어 영조 때 대규모의 준천작업을 실시해야 하는 원인이 되었다.

≪준천사실≫에서는 준천사를 설치하여 서울 성내의 하천을 치는 준설사업에 대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는데, 준설과정은 먼저 개천내의 오물과 토사를 말끔히 제거하여 개천(開川)한 다음 양쪽의 제방을 흙으로 다지고 그 위에 토양유실을 막고자 버드나무를 심었다.

영조 36년 2월 18일부터 4월 15일까지 57일간에 걸친 이 공사 때 방민(坊民)의 출역(出役)은 모두 15만 명이었고, 그 중 품삯을 받은 장정만도 5만 명이었으며 이에 쓰인 경비는 돈 3만 5000냥과 쌀 2,300여 포가 소요되었다.

그러나 이 공법도 오래 가지 못하여 매년 호안용 말목(抹木)을 양쪽의 제방 안쪽에 박아 목책을 설치하였으나 이 또한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이에 1763년 6월에서 8월 6일까지 사이에 석축을 쌓아 오늘날의 공법과 유사한 호안공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록 끝부분에 나오는 준천사절목에서는 사업의 지시와 사업의 내용 그리고 결과보고에 이르는 일련의 절차를 절목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연려실기술』
『조선시대 도시사회연구』(손정목, 일지사, 1977)
『서울육백년사』 2(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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