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회(聲鳴會)라고도 한다. 1910년 8월로 접어들면서 한국을 강점, 병합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이 더욱 명확해지자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시베리아 지방의 애국 동포들은 한인학교에서 한인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한국병합을 저지하기 위한 항쟁기관으로 이상설(李相卨) 등이 주동이 된 성명회를 결성하고 취지서를 발표하면서 궐기하였다.
8월 23일 하오 4시 블라디보스토크의 『다리요카야 우크라이나』 신문을 통해 합병 확정의 비보를 전해들은 한인동포들은 즉시 한인학교에 회합하였다. 비통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 회의의 결의에 따라 성명회의 이름으로 “유혈적인 방법에 의하여 합병을 저지한다.” 는 격렬하고도 비통한 격문 1,000매를 인쇄하여 러시아와 만주 각지의 애국 동포들에게 배포하고 결사 항쟁을 호소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에는 ‘국제 공약에의 배신’을 나무라는 공한을 보내고 각국 정부에는 합병 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의 선언서(이상설이 선언서를 기초하였고, 성명회 대표로 추대된 유인석이 보완하여 완성하였으며, 유인석 · 이상설 등 총 8,624명의 독립운동지사들의 서명이 첨부되었음)를 보내기로 하였다. 각국 정부에 보낸 전문 내용은 ‘대한일반인민총대 유인석(大韓一般人民總代 柳麟錫)’ 명의의 한문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청국 정부에는 그대로 보냈으나 기타 열강에는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발송하였다.
그날 밤 50여 명의 성명회 청년들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인과 거류지를 습격하기 시작하였다. 8월 25일에는 부녀자까지 가담하는 등 결사대 인원이 1천여 명으로 증가되었다. 이어 26일에는 주요 인물 50여 명이 블라디보스토크의 북쪽 인근에 있는 ‘친고재’에서 모임을 가지고 일본 영사관의 관할을 결사적으로 거부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이범윤은 ‘두만강의 결빙기를 기다려 의병을 200명 단위의 부대로 편성, 북한 지역으로 진입시켜 총 병력 1만 명에 달하면 독립 전쟁을 전개한다.’는 제의를 의결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성명회는 취지서 및 선언서와 각 종 격문을 인쇄 · 반포함으로써 간도는 물론 시베리아 지방의 한인에게까지 활동을 더욱 확대시켜갔다. 그러나 9월 11일을 기하여 일본이 러시아에 대해 항의 제기와 주동 인사들의 체포, 인도를 요구하자, 러시아당국은 이상설 · 이범윤 등 성명회와 모체라 할 수 있는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의 간부 20여 명을 체포, 수감하고 한인의 모든 정치활동을 엄금하였다. 그 결과 더 이상의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해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