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문집』의 간행은 유중교 사후 2년 뒤인 1895년에 문인들이 모여 충청북도 제천 장담(長潭)에서 편집에 착수했다가 을미의병에 참여하는 일로 중단되었으며, 1897년 황해도 평산군 절곡(節谷)에서 마쳤다. 처음 간행 때부터 활자 인쇄를 도모했으나 판본 형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 뒤 문인들의 상당수가 만주에 망명해 요동(遼東) 관전(寬甸)에 머물고 있는 동안 1927년 그곳의 진자재(晉字齋)에서 활자로 간행하였다. 1974년 관전본을 영인해 2책으로 간행하였다. 관전본에 실려 있는 문집의 서문은 1926년 이직신이 쓴 것이고, 발문은 이배인(李培仁)과 이양백(李陽白)이 지은 것이다.
60권 30책. 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과 장서각 도서 등에 있다.
권1에서 권50까지는 본집으로, 권1에 시, 권2에 소, 권3∼22에 서(書), 권23∼39에 잡저, 권40에 잡저·서(序), 권41에 기, 권42에 제발(題跋)·잠·명·찬·송, 권43에 혼서·상량문·고축·제문, 권44에 애사·묘갈·묘표·묘지, 권45에 행장, 권46에 유사·어록, 권47∼48에 제왕승통고, 권49∼50에 현가궤범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51 이하는 부록으로, 권51∼56에 어록, 권57에 제문, 권58에 연보, 권59∼60에 행장이 실려 있다.
이 문집에는 서(書)와 잡저의 비중이 매우 높고, 「제왕승통고(帝王承統考)」와 「현가궤범(絃歌軌範)」은 독립된 저술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특히, 부록에서 「어록(語錄)」이 6권에 이르고 「행장」이 2권이나 되는 점은 그의 언론과 행적에 문인들의 관심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보여 준다.
시는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으며 동시에 술회(述懷)와 언지(言志)의 도학적 시로 이루어졌다. 첫머리의 금조(琴調)는 자신이 연주하던 거문고인 자양금(紫陽琴)을 위한 악곡이다.
소(疏)는 1882년(고종 19) 사헌부지평의 벼슬에 제수되자 올렸던 소가 있다. 여기서 자신의 시대적 신념과 의리론을 펴고 있다. 그는 공자가 『춘추』를 지은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의 의리와 맹자가 제시한 한선성방음사(閑先聖放淫邪)의 의리를 기준으로 들고, 당시의 양이(洋夷)를 이적보다 낮은 금수(禽獸)로 간주하여 해독이 큼을 지적해 물리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4,000년 전해온 중화의 일맥(一脈)과 공자·맹자 이래 2,000년 전해온 도학의 정통이 우리나라에 맡겨져 있음을 강조해 중화와 도학 정통을 계승하도록 역설하였다.
「기대죄시말(記待罪始末)」은 1881년 이만손(李晩孫)을 중심으로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가 올라가 개화 정책에 항거한 데 대해 지지하는 서한을 스승 김평묵(金平默)의 이름으로 보내어 김평묵이 투옥되고 섬(智島)으로 유배되기에 이르자, 그가 의금부에 대죄(待罪)해 함께 벌을 받겠다고 요청했던 경위를 밝힘으로써 당시 위정척사론의 활동상을 보여주고 있다.
서(書)는 스승 이항로(李恒老)·김평묵과 임헌회(任憲晦)를 비롯한 사우(師友)와 문인들에게 보낸 것이다. 스승 김평묵을 비롯해 사우간에 일어난 심설(心說) 논쟁에 관한 왕복 논변을 비롯하여 학설의 토론이 풍부하다.
잡저 권23∼25에는 경학 연구로 『소학』과 사서에 관한 경설(經說)인 「대학고금본도(大學古今本圖)」·「대학강목도(大學綱目圖)」·「소대학합도(小大學合圖)」의 도상이 포함되어 있다. 권26의 「삼경연의(三經衍義)」는 삼경에 대한 해석이고, 권27∼28의 「역설(易說)」은 역학에 관한 연구이며, 권29의 「하도낙서설(河圖洛書說)」에는 여러 도상들이 포함되어 있다.
권30에 송대 도학자들의 중요 저술들로서 「태극도설」·「서명」·「정몽」·「논지십조훈(論志十條訓)」·「논조존장설오서(論操存章說五書)」·「경재잠」·「숙흥야매잠」의 2도(圖) 등에 관한 논의가 있다. 권31의 「송원화동사합편강목서법(宋元華東史合編綱目書法)」은 이항로 문하의 도학적 역사관을 보여 주며, 「삼정책(三政策)」은 1867년 할아버지를 위해 대신 지은 삼정의 개혁 방책이다. 「유씨가전(柳氏家典)」과 「유씨종법(柳氏宗法)」은 그의 집안과 고흥유씨(高興柳氏)의 법전을 보여준다.
권34∼35의 「정통론」·「허형정법론(許衡正法論)」·「갑신변복령후시서사제자(甲申變服令後示書社諸子)」 등은 그의 정통론적 입장을 밝힌 글들이다. 「심여명덕형이상하설(心與明德形而上下說)」은 심(心)개념에 관한 화서문하의 쟁점을 자신의 입장에서 제시한 것이다.
권37∼38의 「옥계산록(玉溪散錄)」·「연거만지(燕居漫識)」는 그의 학문적 견해를 수록(隨錄)한 것이며, 권39의 「강의발문(講義發問)」은 강의에서 제자들에게 질문한 문제점들이다. 권46의 「어록」은 그의 두 스승 이항로와 김평묵의 어록이다.
권47∼48의 「제왕승통고」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왕위 계승에서 자식이 아버지를 계승하는 경우가 아닌 제계형(弟繼兄)·형계제(兄繼弟)·질계숙(姪繼叔)·숙계질(叔繼姪)·손계조(孫繼祖)·종조계종손(從祖繼從孫)의 비정상적 계승 사례들을 역사 기록을 통해 일일이 고증하며, 이에 따른 종묘(宗廟)에 제향되는 배치의 위차도(位次圖)를 제시함으로써 왕통의 계승에 정당성의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왕조의 계승이 지닌 정치적 중요성에 대하여 민감한 관심을 가졌으며, 이 정통성으로 모든 사회적 정통성의 기준을 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현가궤범」은 그 자신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공자의 문하에서 사람을 가르치고 도를 배우는 도구는 ‘현가’이었음을 확인하고, 성정의 정정한 덕에 근본하고 합해 조화를 이루는 군자의 ‘현가’를 이룸으로써 천하를 교화하고자 도모한 것이다. 율려(律呂)·금률(琴律)·정률(正律)·조현(調鉉)의 이론과 도해(圖解)를 고증하고, 「녹명(鹿鳴)」 등 『시경』의 편들 및 송대 도학자들의 명문을 악장(樂章)으로 작곡해 대중을 교화하고자 했으며, 이이(李珥)의 「고산가(孤山歌)」와 그가 지은 「옥계조(玉溪操)」를 작곡하였다.
유중악(柳重岳) 등 40명의 문인들이 기록한 「어록」은 그의 사상과 행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행장」은 그의 문인 이직신(李直愼, 일명 昭應)이 지었다. 어록·연보·행장이 매우 자세하고 분량도 많은 것으로 보아 그의 학문적 영향력과 높은 비중을 확인할 수 있고, 또한 그의 문하에서 그를 기리기 위한 정성이 지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