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3년(선조 6)에 유수 남응운(南應雲)이 유림세력과 협의, 정몽주(鄭夢周)와 서경덕(徐敬德)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선죽교 위쪽에 문충당(文忠堂)을 창건하면서 비롯되었다.
1575년에 ‘숭양(崧陽)’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668년에 김상헌(金尙憲), 1681년에 김육(金堉)과 조익(趙翼), 1784년에 우현보(禹玄寶)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23년(순조 23)에 유수 김교근(金敎根)과 김이재(金履載)가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중건하고 사우와 강당을 중수하였으며, 1930년에 우상훈(禹相勳)이 보수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강당·동재·서재·신문(神門)·고자실(庫子室) 등이 있으며, 사우에는 정몽주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서경덕·김상헌·김육·조익·우현보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일 만큼 개성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었으며, 숙종·영조·고종이 개성에 행차하였을 때에는 특히 견관치제(遣官致祭)하는 은전을 받았고, 영조는 친필로 어필사액(御筆賜額)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유물로는 영조어필게액기(英祖御筆揭額記)를 비롯하여 어제시·중수기·상량문 등의 게판이 보관되어 있다. 광복 이후의 사항은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