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황전면 선변∼회룡간 도로확장공사과정에서 훼손이 불가피하게 됨에 따라 전남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원래 7기의 고인돌이 위치하고 있어 현지에서는 ‘칠성바위’라고 불렸다. 그러나 조사 결과, 7기의 고인돌 외에 5기의 돌널이 더 조사되었다.
7기의 고인돌은 타원형에 가깝게 분포되어 있다. 그 중 6기의 고인돌에는 시신의 매장을 위한 돌널이 축조되어 있었지만, 나머지 1기의 고인돌에는 여러 개의 받침돌만 있을 뿐 돌널은 마련되지 않았다.
이처럼 여러 기의 고인돌이 모여 있는 경우, 그 중 1∼2기에는 매장시설이 마련되지 않은 예가 종종 조사된 바 있다. 그러한 고인돌은 묘역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구실을 하는 것으로서 ‘묘표식 고인돌[이칭: 묘표식지석묘(墓標式支石墓)]’라고 부르기도 한다.
7기의 고인돌 사이에는 지상에 아무런 시설이 노출되지 않았던 돌널 5기가 새로 확인되었다. 이는 모두 고인돌과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이며, 고인돌의 덮개돌만 마련되지 않았을 뿐 돌널의 구조는 고인돌과 동일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흔히 고인돌 군집지역에서 확인된 바 있다.
이것은 원래 덮개돌을 갖춘 고인돌이었다가 후대에 덮개돌이 파괴되었을 가능성과 원래부터 덮개돌이 없었을 가능성의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논란의 여지가 없겠으나, 후자의 경우라면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숨어있을 것이다.
고인돌 피장자와 돌널 피장자 사이에 신분상의 차이가 있을 가능성, 고인돌 피장자와 돌널 피장자가 계통적으로 다른 집단에 속하는 사람일 가능성, 또는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에 대한 학술적인 논의는 이루어진 바 없다.
덮개돌의 파괴 가능성이 없는 고인돌군에서도 그와 같은 상황이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미뤄볼 때, 고인돌로 대표되는 당시 사회가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간돌검·돌화살촉·무문토기 등이다. 특히, 간돌검은 주로 덮개돌이 갖추어진 고인돌에서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