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산(靈山). 증조할아버지는 전교령(典校令)을 지낸 신지화(辛至和)이고, 할아버지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낸 신화(辛華)이다. 아버지는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낸 신원경(辛原慶)이고 장인은 곡산인(谷山人)이며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강윤성(康允成)으로 이성계(李成桂)의 동서이다. 당시에 ‘신왕(辛王)’이라고 불릴 만큼 세도(勢道)가 있었던 형 신예(辛裔)와 동생 신순(辛恂: 李和의 동서)과 더불어 치부와 발호가 매우 심하였다.
1357년(공민왕 6) 채하중(蔡河中)이 역모해 옥중에서 목숨을 끊자, 그 연루자로 지목되어 전우상(全祐祥)·조휘(趙暉)·정인(鄭姻)·강찬(康贊)·홍상재(洪尙載) 등과 함께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공민왕(恭愍王)이 신돈(辛旽)을 기용해 공신 재상가(宰相家)를 숙청할 때에도 신돈의 동종(同宗)이라 하여 판서(判書)로 기용되었다.
한편 신돈을 초대해 대접하고자 친구인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 강원보(姜元甫)의 집에 그릇을 빌리려고 심부름꾼을 보냈었다. 이때 강원보가 장차 우리가 신돈을 제거하려 한다고 통고하자, 이를 신돈에게 알렸다. 그날 밤에 신돈이 궁검(弓劍)으로 호위하고 왕에게 고해 모반자를 순군(巡軍)에 가두고 국문해 처단하였다.
1371년 신돈의 당여(黨與)가 거사를 모의하자, 문객(門客) 선부의랑(選部議郎) 이인(李韌)이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밀서(密書)를 투입하였다. 이에 신돈의 당이 숙청되면서 신귀도에 유배된 뒤 참살되었다. 동생 신우(辛祐), 아들 신극공(辛克恭)·신극람(辛克濫)·신극례(辛克禮)·신극경(辛克敬)은 모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사위 정희계(鄭熙啓) 역시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가 되었다. 또, 조카인 신유현(辛有賢)·신유정(辛有定)도 개국원종공신으로 영산(靈山) 신씨(辛氏) 일문은 조선조의 명문세가로서 기틀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