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백거(伯擧), 호는 소은(素隱). 참의 신희남(愼喜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여경(愼餘慶)이고, 아버지는 진사 신인(愼諲)이며, 어머니는 이용(李溶)의 딸이다.
진사시에 합격,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15년 홍문관정자를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광해군의 실정을 보고 사직하고, 전라남도 영암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 홍문관·사간원의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54년(효종 5)에 다시 나와서 홍문관부제학을 지내고 대사간·이조참의가 되었다. 1659년에 당시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이 종2품관직에 인물이 부족하다 하여 당상관 중에서 등용할 수 있는 네 사람을 추천하였는데, 신천익이 그 중 한 사람으로 이조참판에 서임되고, 이어 한성부우윤에 특제(特除)되었다.
그 뒤 관직을 버리고 귀향한 뒤로는 시정(時政)과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문장과 시부(詩賦)에 능하여 송시열도 찬탄한 바 있으며, 아우 신해익(愼海翊)과 더불어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나랏일보다 사사로운 일에 더 힘을 기울였다 하여 당시 선비들 사이에 비난도 적지 않았다. 영암 영보사(永保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소은유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