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31본산이 지정된 때에는 전등사(傳燈寺)의 말사였다. 651년(진덕여왕 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으며, 자장은 절터의 동쪽에 태양봉(太陽峰)과 경성대(景星臺)가, 남쪽에 삼성봉(三聖峰)과 영주대(迎主臺)가, 서쪽에 서왕곡(西往谷)이, 북쪽에 용봉치(龍鳳峙)가 둘러싸고 있는 것을 살핀 뒤 심장의 위치에 해당되는 곳에 절을 짓고 심복사라 하였다.
그 뒤 폐허가 된 것을 1219년(고종 6)에 천희(天熙)가 중창하였다. 중국에서 온 천희에게 고종은 명산에 대찰을 지을 것을 권하였는데, 천희는 이곳에 이르러 자장이 창건했던 절터에 가람을 세우라는 노인의 현몽을 얻고, 다음날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니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하였으므로 옛터에 절을 중창하였다. 고종은 노비 약간 명과 전답 250여 결을 하사하였다.
그 뒤 1396년(태조 5)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화성에서 이 절로 와서 대웅전·응진전(應眞殿)·명부전·영자전(影字殿)·좌우선승당(左右禪僧堂)·동서별실(東西別室)·만세루(萬歲樓)·종루(鐘樓) 등을 신축하였으며, 대웅전 앞에 10층의 다보탑(多寶塔)을 건립하였다. 태조는 중창 소식을 듣고 향촉과 전답 200결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1,000여 칸에 달하던 당우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1644년(인조 22)에 인감(印鑑)과 일원(日元)이 법당과 승당을 중건하였고, 1649년에는 이이(頤怡)·인준(印俊)·현오(玄悟)·태희(太熙) 등이 좌우선당과 동서별실·누각·불전·요사채 등을 중건하였다. 1681년(숙종 7)에는 창건 및 중창주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사적비를 세웠고, 1684년에는 무학대사가 세웠던 다보탑을 중수하였다.
그 뒤 1932년에 주지 임태화(林泰化)가 동서에 요사채 16칸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의 주위가 경승지일 뿐 아니라 풍수 지리학상 명당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고려 이후의 명문 묘소 또한 많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