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학 ()

천명도설 / 정지운
천명도설 / 정지운
유교
개념
마음[心]의 문제를 사상의 핵심으로 삼는 학문. 유학.
정의
마음[心]의 문제를 사상의 핵심으로 삼는 학문. 유학.
개설

넓은 의미에서 마음의 개념에 관한 논의를 일반적으로 가리키고 있으며, 좁은 의미에서 마음의 본체를 인식하고 수양의 방법을 구명하는 데 관심을 가진 학문적 입장을 심학이라 한다. 심학은 학파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세 가지 경우를 들 수 있다.

송대의 이학(理學)이 발전하면서 ① 정주학(程朱學) 혹은 주자학(朱子學)에서는 심성수양론적 영역을 심학이라 일컬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심학은 이학 혹은 도학(道學)에 포섭되는 것이요 상충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비하여 ② 육왕학(陸王學) 혹은 양명학(陽明學)에서는 마음을 본체로 인식하는 입장을 심학이라 일컬었으니, 이러한 의미의 심학은 이학 속에 포함되고 있으나 도학과 대립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때로 ③ 정주학에서는 불교를 가리켜 심학이라 일컫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일진법계(一眞法界)를 일심(一心)으로 제시하는 화엄종(華嚴宗)이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표방하고 제불(諸佛)과 일체중생을 일심으로 파악하는 선학(禪學)의 학풍은 마음을 우주의 본체로 파악하고 있으므로 심학이라 일컫는다.

성즉리설(性卽理說)을 표방하는 성리학에서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내세운 육왕학이 마음을 본체로 인식하는 점에서 선학과 상통한다는 관점에서 육왕학을 선학과 일치시키기도 한다. 이때 성리학자들은 자신의 입장을 성종가(性宗家)로, 육왕학과 선학은 심종가(心宗家)로 일컫기도 한다. 여기에서 심학이라는 용어를 공유하는 세 가지 유형의 개념내용에 따라 ‘수양론적 심학[程朱學]’·‘본체론적 심학[陸王學]’·‘불성적 심학[佛敎]’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심학의 발전과정

마음을 이기(理氣) 개념으로 파악하는 송대 이학에서 주희(朱熹)는 심즉기설을 내세워 마음을 기질로 보고 성품을 이치라 보는 입장이지만,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의 견해는 심즉리설에 따라 마음을 그 자체로 이치라 파악하여 이치와 기질을 일치시키는 입장을 지닌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전개과정에서도 이황(李滉)이 제시한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에 따라 마음에서 본체와 기질의 양면을 파악하는 입장과, 이이(李珥)에 의하여 확고하게 제시된 성리심기설(性理心氣說)에 따라 ‘성품이 이치요, 마음은 기질’이라 보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한말 성리학에 와서는 이항로(李恒老)에 의하여 심주리설(心主理說)의 견해가 제시되고, 한 걸음 나아가 이진상(李震相)에 의하여 심즉리설이 주장되고 있는데, 이 경우는 성리학적 심즉리설로서 육왕학적 심즉리설이 엄격히 구별되고 있다. 이진상은 성리학의 심즉리설은 마음의 본체만을 이치(理)와 일치시키지만, 육왕학의 심즉리설은 마음의 본체와 현상의 전체를 통합하여 이치로 보는 것으로 분석하여 대비시켰다.

마음의 개념은 여러 측면에서 분석되어왔다. 마음이 발동하기 이전[未發]과 발동한 이후[已發]에 따라 체(體)·용(用)의 양면으로 구분하여 각각 본체로서의 성품과 작용으로서의 감정으로 분석한다. 이에 따라 장재(張載)는 “마음이 성품과 감정을 통섭한다(心統性情).”고 파악하였으니, 마음이 성품을 포섭하는 심개념을 보여준다.

이에 비하여 “마음은 기질이요 성품은 이치(心氣性理)”라 파악하는 입장은 성품과 마음을 우열관계로 파악하며, 한말 성리학자 전우(田愚)는 성존심비설(性尊心卑說) 혹은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을 주장하여 존비관계 혹은 사제관계로 마음보다 성품을 높이고 있다. 주희는 도심(道心)을 성명(性命)의 정대함에 근원하는 것으로 보고 인심(人心)을 인욕의 사사로움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 마음이 나타나는 현상에서 선악의 두 가지 원천을 분석하였다.

이에 따라 마음에 선의 근원과 악의 계기를 발견하고 악을 억제하며 선을 실현하는 수양론적 방법이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심성의 수양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적 심학이거나 마음의 본체를 근거로 하는 육왕학(양명학)적 심학의 구별은 후기에 더욱 엄격해졌고, 심학의 개념이 발생하고 발전하던 송대의 학풍에서는 수양론적 심학과 본체론적 심학의 성격이 엄격히 구별되지 않고 통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이 두 가지 심학이 지닌 경전적 근거는 ≪서경≫<대우모 大禹謨>편에서 말한 인심(人心)·도심(道心) 문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전성(前聖)의 심법(心法)을 강조하는 것은 심학의 연원을 상고의 성왕(聖王)에까지 소급시키고 있다. 그러나 심학의 가장 확고한 근거는 ≪맹자≫에 두고 있다.

맹자가 말한 ‘구방심(求放心)’·‘반신이성(反身而誠)’·‘존심양성(存心養性)’ 등은 수양론적 심학개념의 근원이고, ‘진심지성(盡心知性)’을 역설하거나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 있다(萬物皆備於我).”고 선언하는 것 등은 본체론적 심학개념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

‘묵이식지(默而識之)’와 ‘일관지도(一貫之道)’를 강조한 공자 이래로 ≪대학≫의 성의(誠意)·정심(正心)과 ≪중용≫의 신독(愼獨) 등에서 마음의 수양문제는 유교사상의 전통을 이루었지만, 마음의 본체에 관한 인식과 심성수양의 실천방법은 경전 가운데서 ≪맹자≫가 가장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송대 이학의 전통에서 심학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장재는 “마음이 성품을 다할 수 있다(心能盡性).”하여 마음을 인격의 주체로 파악하였으며, 한걸음 나아가 정호(程顥)는 “마음이 곧 하늘이다(只心便是天).”라 하여, 마음을 우주의 본체로 파악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송대 이학의 전개 과정을 보면, 북송대에 도체(道體)·성체(性體)를 천착(穿鑿)하였던 학풍으로부터 남송과 명대에 심체(心體)를 주창하는 학풍으로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 지적된다. 이러한 심학적 관심으로 옮겨가는 전환기의 선두에 호굉(胡宏)이 등장하였다.

남송대의 호굉은 심학적 입장을 심화시키는데 적극적 구실을 하였던 인물이다. 호굉은 “천명은 성품이요 인성은 마음이다(天命爲性, 人性爲心).”라 하여 성품과 마음을 존재구조에서 하늘과 인간으로 대응시키며 동시에 천명·성품·마음을 일관시킴으로써, 마음을 근본 존재의 구체적 현실로 확인시키고 있다. 그는 “마음이란 천지를 알고 만물을 주재함으로써 성품을 이루는 것이다(心也者, 知天地, 宰萬物, 以成性者也).”라 하여, 마음이 실천적 주체로서 중심개념이 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는 “천지 사이에 욕심을 일삼으니 심학이 전하지 않는다.”고 하여, 심학이라는 용어를 학문적 전통으로 확인하고 있다. 남송대에서 명대에 걸쳐 이학의 전개과정에서는 주희의 도학적 전통이 원대 이후 관학으로 채택되었으나 오징(吳澄)·진헌장(陳獻章)을 거치면서 뚜렷이 심학적 경향을 띠게 되었고, 그 심학화의 절정을 이루었던 인물은 왕수인이다. 왕수인의 등장으로 본체론적 심학이 광범하게 확산되었으며 주자학, 곧 도학의 입장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의 심학

조선 전기에 유학사상이 주자학-도학으로 정립되면서 수양론적 심학은 일찍부터 성장하였다. 권근(權近)은 <천인심성합일지도 天人心性合一之圖>에서 심개념을 중심에 두고 하늘과 인간이 연결되고 성품이 마음에 통합되는 유기적 일관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심의 본체론적 위치와 수양론적 근거를 확인하고 있다. 장재의 심통성정론에 근거한 성리학적 심개념을 분석한 전통은 권근 이후로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 天命圖>와 이황의 <심통성정도 心統性情圖>로 이어지면서 더욱 정밀하게 구별된다.

‘구방심’에 근거하여 ‘존심(存心)’하는 수양론을 강조한 세종 때의 유학자 안지(安止)의 주장을 계승하여, 그의 제자 홍치(洪治)는 수양론적 심학을 체계화하여 ≪심학≫(2권)을 저술하였으며, 여기에서 그의 심학개념이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수양론을 의미함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가 인용한 당시 학자들의 견해를 통하여 이 시기에 수양론적 심학의 이해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심학차제도 心學次第圖>와 <심성정도 心性情圖>를 그려 심학의 체제와 심개념을 도상화하고 있으며, 그것은 원나라 정복심(程復心)의 <심학도>를 참고한 것이다. 중종 때의 조광조(趙光祖)는 “도는 마음이 아니면 의지하여 설 곳이 없다.”하여 마음이 진리인식의 주체임을 강조하고, “일심의 미묘함이 기강과 법도의 근본이다.”라 하여 통치질서도 마음에 근거하는 것임을 밝혀 마음의 인식론적·정치적 구실을 강조하였다.

그는 왕명에 따라 <계심잠 戒心箴>을 지어 수양론적 심학을 통치원리로 응용하고 있다. 조식(曺植)은 <신명사명 神明舍銘>에서 수양론적 관심에서 마음의 작용과 조건을 도상으로 제시하였다. 성리학적 심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인식한 인물은 이황이다. 이황은 마음의 다양한 양상과 경(敬)을 통하여 마음을 주재하는 수양론적 심학을 정밀하게 분석하였다.

동시에 그 성리학적 근거로서 체용론 및 성품과 감정의 구조를 통하여 심개념을 확고하게 정립해갔다. 그는 심무체용설(心無體用說)을 비판하여 마음에 체·용이 갖추어 있는 ‘성리학의 심학’과 마음에 체만 있고 용이 결여된 ‘선학의 심학’을 구분하고 있다.

먼저 이동(李侗)·주희는 정좌(靜坐)를 심학의 본원으로 삼았지만 선학이 아님을 지적함으로써, 정좌를 통하여 선학으로 빠진 진헌장이나 선학과 비슷하면서 선학이 아닌 왕수인 등의 입장과 명확히 구별하였다. 그가 ≪심경≫을 신명처럼 공경하고 부모처럼 존중한다고 한 것은 ≪심경≫을 통하여 선현의 심법(心法)이 집성된 수양론적 심학의 기초를 확보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황은 그의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통하여 성리학의 우주론적 근원으로부터 학문방법과 절차의 문제를 거쳐 마음의 개념과 수양방법을 묶어서 하나의 우주론과 수양론을 결합한 도학 곧 성학(聖學)의 체계를 세웠는데, 이 체계의 근원과 기초는 우주론과 학문론의 문제라 하겠지만, 핵심과 결론을 이루는 것은 수양론적 심학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제6도 <심통성정도>는 원나라 정복심의 도상을 심화시켜 심개념의 구조를 분석하고, 제8도 <심학도 心學圖>는 정복심이 그린 도상으로 마음의 다양성을 수양론적 구조로 체계화하고 경을 통한 수양방법의 양식을 구성하였다.

또한, 제9도 <경재잠도 敬齋箴圖>는 주희의 잠(箴)을 왕백(王柏)이 그린 것으로 경을 통한 수양론적 실천에서 마음의 관심영역에 따른 다양한 과제를 분석하고, 제10도 <숙흥야매잠도 夙興夜寐箴圖>는 진백(陳柏)의 잠을 이황이 그린 것으로 경의 수양론적 실천을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하루의 일과 속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과제를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도상들은 수양론적 심학의 체계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정수를 모은 것으로, 그 이후 수양론적 심학의 지속적 확산과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다. 특히, 심의 구성과 수양론적 양상 및 방법을 정밀하게 분석할 뿐 아니라, 이를 도상을 통하여 심개념과 수양론의 구조를 분석하고 표출함으로써 심개념의 인식과 수양론의 구체적 실천을 위한 방법으로서 도상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이 도상의 미세한 구성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성리설 내지 수양론적 논쟁이 벌어짐으로써 심학의 토론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이 사실이다. 이이는 성리설에서 이황과 대립된 심개념을 제시함에 따라 수양론적 방법에서도 차이를 보여준다.

그는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를 그리고 여기에 붙인 <인심도심도설>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자(治心者)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도심인 줄 알면 확장하고 인심인 줄 알면 살펴서 도심으로 절제하여 도심의 명령을 듣도록 하면, 인심도 도심이 된다.”고 하여, 인심과 도심을 대립적으로 파악하기보다 인심을 도심으로 순화시켜가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는 마음의 본체를 ‘거울의 맑게 비침과 저울의 수평을 이룸(鑑空衡平)’으로 비유하고, 그 작용에서 기질에 구애되어 어둡거나 어지럽게 되는 것임을 지적한다.

따라서, 이 ‘기질을 바로잡음(矯氣質)’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다는 수양방법을 제시한다. 이처럼 교기질(矯氣質)을 강조하는 이이의 수양론적 심학은 심학이라는 이름으로 일컫기보다는 수기(修己)의 체계 속에 교기질·양기(養氣)·정심(正心) 등의 문제로 제시되고 있다. 심학의 근원은 ≪서경≫<대우모>편에서 제시된 인심·도심의 개념에서 근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비하여 인심·도심의 개념을 비롯하여 경전에 나타난 다양한 심학적 개념들을 채택하여 심학의 체계로 구성한 것이 정복심의 <심학도>이다. 이이가 <인심도심도>를 중심으로 수양론적 심학의 근원적 인식을 추구한다면, 이황은 <심학도>를 중심으로 활발한 토론을 통하여 수양론적 심학의 체계적 인식을 추구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윤휴(尹鑴)는 인심·도심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서 정자(程子)·주희·나흠순(羅欽順)의 세 가지 해석에 따라 <제순인심도심지도 帝舜人心道心之圖> 3도를 그림으로써, 수양론적 이론의 기초를 확인하고자 하였으며, 또한 <태공단서경의지도 太公丹書敬義之圖>를 그려, 공경함[敬]이 나태함[怠]을 이기고 의로움[義]이 욕심[欲]을 이기는 수양의 방법을 태공 이후로 옛 성왕이 전해오는 심법으로서 중시하고 있다.

본체론적 심학은 조선 후기에 정제두(鄭齊斗)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왕수인의 심즉리를 해석하여 “이치가 마음에서 발현하니 마음의 조리가 곧 이른바 이치요, 마음과 이치를 두가지로 삼아 합쳐서 하나로 삼는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밝힌다. 그것은 마음이 본체요 이치는 마음의 조리(條理)로서 마음에 속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 마음의 본체는 왕수인이 만년에 양지(良知)로 제시하였으며, 이러한 양지개념에 따라 민이승(閔以升)이 제시한 <양지도 良知圖>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정제두는 <학변 學辯>에서 성인의 학문 곧 성학(聖學)을 심학 혹은 성학(性學)으로 확인하고 동시에 그것은 마음의 천리[心之天理]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근대의 심학

마음의 개념은 한말 도학에 와서 하나의 큰 쟁점이 되면서 심설논쟁(心說論爭)은 수양론적 심학의 근거를 구명하였다. 이항로 계열의 화서학파(華西學派) 안에서는 심(心)에 대해 주리·주기설로 양분되어 논쟁을 전개하면서 마음의 개념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신익균(申益均)은 심자도(心字圖)를 그리고 도설(圖說)을 지어 문자구조를 통한 해석을 하였다.

전우는 심즉기설에 근거하여 마음 위에 성품을 높이는 심설을 제시하고, 그와 그의 문인들은 당시 이항로·이진상·기정진(奇正鎭)·조긍섭(曺兢燮) 등 한말 성리학의 심주리설 내지 심즉리설에 대하여 여러 방면으로 비판하여 논쟁을 벌여나감으로써 심설논쟁의 핵심에 놓여 있었다.

이진상은 <성학도설 性學圖說>·<심경도설 心經圖說>을 지어 수양론적 심학의 성리학적 근거와 수양론적 실천과제를 분석하였으며, 그의 제자 곽종석(郭鍾錫)은 이진상을 이어 심의 본체적 인식을 정립해 갔다. 하겸진(河謙鎭)은 <심위자모설 心爲字母說>을 지어 성리학전통의 다양한 심개념을 종합하고자 시도하였다.

조긍섭은 이진상의 심즉리설과 전우의 성존심비설을 양쪽 다 비판하면서 마음을 이·기로 분해될 수 없는 직접적 실체로 파악하였다. 김황(金榥)은 이황을 동방심학의 종장으로 지적하고, 이황 이후 성리학의 계보를 제시한 <동유심학약도 東儒心學略圖>를 지음으로써, 성리학과 심학을 동일한 용어로 쓰기도 하였다. 정복심의 심학도를 이황이 정착시킨 이후 여러 성리학자들에 의하여 심학도가 검토되고 수정되거나 또는 새로운 도상으로 표현되었던 일이 많았다.

이러한 사실은 심학이라는 이름으로 수양방법론의 연구가 지속되었음을 말해준다. 신이강(辛二剛) 등의 <심학도>와 박세채(朴世采)의 <간정임은정씨심학도 刊定林隱程氏心學圖>를 비롯하여, 조익(趙翼)의 <심학종방도 心學宗方圖>, 김응환(金應煥)의 <심학종요도 心學宗要圖>, 최두병(崔斗柄) 의 <심학상전도 心學相傳圖> 등 많은 도상들이 제시되었고, 김만걸(金萬傑)의 <심학도설변설 心學圖說辨說>, 손호영(孫昊永)의 <심학설>, 선우협(鮮于浹)의 <심학지요 心學至要>, 송준필(宋浚弼)의 <심해 心解> 등 많은 논문들이 출현하여 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시켜갔다.

또한, 일제침략기 이후 양명학이 새로운 활기로 살아나 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 등이 출현하였으나, 이때에는 전통적 심학개념이 아니라 양명학으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참고문헌

『심경(心經)』
『전습록(傳習錄)』
「왕양명(王陽明) 심학(心學)의 연구」(송재운, 동국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85)
「이퇴계(李退溪)와 진백사(陳白沙)의 심학사상비교」(몽배원(蒙培元), 『퇴계학보』 65, 퇴계학연구원, 1990)
「퇴계심학(退溪心學)의 재연구」(진래(陳來), 『퇴계학보』 70, 퇴계학연구원, 1991)
『胡五峯的心學』(王開府, 臺灣 學生書局, 1978)
『中國哲學範疇發展史』(張立文, 中國人民大學 出版社, 1986)
집필자
금장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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