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의지(宜之), 호는 뇌곡(磊谷). 아버지는 찰방 안기(安沂)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로 도사 남지(南至)의 딸이다. 이정(李楨)의 문인이다.
1591년(선조 24) 45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 1601년 선교랑(宣敎郎)·제용감(濟用監)·사옹원(司甕院) 등의 봉사, 1605년 삼가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권문세가와 파당에 치우침이 없이 충직과 실천을 지표로 삼아서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와 호호정(浩浩亭)을 건립하여 경전을 연구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부형이 적병과 싸우다가 학살을 당함에 진중에 돌입하여 시신을 거두고 결사 대항하니 왜병이 그의 충효에 감복하여 마을 앞에 ‘忠孝里(충효리)’라는 세 글자를 써놓고 물러갔다고 한다. 초계(草溪)의 송원서원(松原書院)에 배향되었고, 저서인 『뇌곡일고(磊谷逸稿)』가 『탐진세고(耽津世稿)』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