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시숙(時叔). 호는 노계(蘆溪). 아버지는 참군(參軍) 안중광(安重光)이며, 어머니는 하빈이씨(河濱李氏) 참판(參判) 이호례(李好禮)의 딸이다.
어려서 김종직(金宗直)에게 수업하였고, 김굉필(金宏弼)·남효온(南孝溫) 등과 교제가 깊었다. 특히 남효온은 안우의 절개와 지조를 높이 평가하여 동한(東漢)의 절의에 비기기도 하였다.
일찍이 향시(鄕試)에 뽑혀 회시(會試)에 응하려는데, 당시 사관(四館: 성균관·예문관·승문원·교서관)에 있는 연소자들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나이가 많은 자와 향생(鄕生)들을 매로 때리려고 하는 광경을 보고, 이르기를 “어찌 부모께 받은 몸을 지니고서 죄없이 스스로 훼손하면서 명리를 구하겠느냐.”하며 응시하지 않고 돌아섰다.
벼슬할 마음을 두지 않으면서부터 김종직과도 뜻이 맞지 않아 틈이 생겼다. 1518년(중종 13) 경상도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의 천거를 받아 벼슬에 비로소 나아가 안음현감을 지냈다.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로서 중종에 인견되었을 때, 『대학』의 성의(誠意)·정심(正心)의 요체와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당시 지방사회의 교육문제와 관련해서, 지방의 교육이 불실한 이유에는 훈도의 자질이 깊이 관련되었음을 지적하여, 훈도에게도 사로계제(仕路階梯: 벼슬길에 등용되는 순차)의 길을 마련하도록 건의하였다. 이미 연로한 까닭으로 경관(京官)에 제수되지 못하고 수령에 보임되었다. 효행으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으며 초계(草溪)의 송원서원(松原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