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진흥왕마운령순수비(眞興王磨雲嶺巡狩碑)」(568)의 수가인명(隨駕人名) 가운데 보인다. 마운령비의 수가인명은 대등(大等)과 하급관리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진골귀족들로서 대등회의의 구성원이었으며, 후자는 대체로 국왕 근시집단으로 보고 있다.
이 가운데 약사인 사탁부(沙喙部)의 매지차(篤支次)는 신라의 17관등 중에 제13관등인 소사(小舍)로 나오는데, 이는 신라 내성 산하관사인 약전(藥典)의 직원구성 곧 ‘사지(舍知) 2명, 사(史) 6명, 종사지(從舍知) 2명’의 구성에서 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곧 사는 일반적으로 제12관등부터 17관등까지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약사의 관등과 그 임명자격에 있어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흥왕 때의 약사는 후일 신라의 중앙관제가 정비되면서 내성산하의 약전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내성 산하에는 이와 관련된 공봉의사(供奉醫師)라는 관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로 미루어 진흥왕 때에는 약사가 후일의 약전과 공봉의사의 직무를 수행하다가 후일에 두 관사로 분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는데, 그러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