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역이정청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후기, 1703년(숙종 29)에 양역 쇄신을 위해 설치한 관서.
이칭
이칭
양역청(良役廳)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1703년(숙종 29)
공포 시기
1703년(숙종 29)
시행 시기
조선 후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양역이정청(良役釐整廳)은 1703년(숙종 29)에 양역 쇄신을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양역 부담을 줄이기 위한 논의 속에서 양역 문제를 전담하는 기구로 설치되었다. 양역이정청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의 양역 사정 작업이 전개되었으며, 이를 통해 중앙과 지방의 과도한 군액을 감축하고, 정해진 군액이 다시 늘어나지 않도록 고정하고자 했다.

정의
조선 후기, 1703년(숙종 29)에 양역 쇄신을 위해 설치한 관서.
설치 목적

임진왜란 이후 오군영(五軍營)의 성립으로 모병제가 제도화되자 양인 장정들은 대부분 군포를 바치는 납포군(納布軍)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오군영이나 중앙의 관청, 지방의 감영 · 병영 등의 재정은 양인 장정들의 군포를 배당받아 이에 의존했기 때문에 이들은 이중 · 삼중으로 군포를 부담하는 일이 일어났고, 액수 또한 2필 ·3필 등 일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군포의 수납 과정에서 실무를 담당한 수령 · 아전들이 백골징포(白骨徵布) · 황구첨정(黃口簽丁) 등의 농간과 횡포를 부려 양역의 폐해는 극심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폐해를 시정하고 양역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숙종 초부터 양역변통(良役變通)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1699년에는 중앙 군아문의 과다한 군액을 줄이기 위해 중앙 아문 및 수어청, 총융청의 군액을 줄이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이를 통해 해당 기관의 군액이 확정되었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1703년 9월에 이를 전담하는 기구로 양역이정청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이정청당상(釐整廳堂上)에 이조판서 이유(李濡 · 수어사(守禦使) 민진후 · 병조판서 윤세기(尹世紀) · 강화유수 이인엽(李寅燁) · 함경감사 유집일(兪集一) 등 5인, 그리고 낭청(郎廳)에 이만성(李晩成) · 정추(鄭推) · 맹만택(孟萬澤) · 김유(金楺) · 김진화(金鎭華) · 이만종(李萬鍾) · 정수(鄭脩) · 홍이징(洪以徵) 등 8인을 임명하였다.

기능과 역할

1704년 양역이정청에서 제시한 양역 변통의 방안은 ① 오군영의 군액(軍額)을 감액하는 군제변통(軍制變通), ② 수군의 각 지휘관에게 삭료(朔料)를 규정하는 수군변통(水軍變通), ③ 균일하지 않았던 군포를 2필로 일원화하는 군포균역(軍布均役), ④ 실제로 입번(立番)하지 않는 수군으로부터 군포를 징수하는 해서수군절목(海西水軍節目), ⑤ 1년에 한 번씩 치르는 시험에서 떨어진 향교의 생도에게서 2필을 징수하는 낙강교생징포(落講校生徵布) 등이었다.

당시 양역이정청의 사정을 통해 중앙 기관의 군액은 22,225명에서 15,805명으로 감축되었으며, 오군영의 각종 군액은 307,926명에서 272,561명으로 줄어들었다. 총 4만여 명의 군액이 감축되어 인원수가 정해진 셈이다. 사정 작업을 통해 줄어든 군액은 군역자가 흩어져 있는 각 지방에 분정하였으며, 이때 정해진 인원수는 임의로 증가시키지 못하도록 하였다. 1705년에는 양역이정청의 주도로 모든 군역을 2필역으로 통일하도록 한 「군포균역절목(軍布均役節目)」이 마련되기도 했다. 이때 함경도와 평안도는 특별한 지역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는데, 평안도의 경우 1712년과 1721년의 조치를 통해 군역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이후 1713년과 1714년에도 추가적인 양역 사정이 시행되어 지방의 군액까지도 인원수가 정해졌다.

의의 및 평가

양역이정청의 활동은 과도하게 늘어난 중앙과 지방의 군액을 감축하고, 그 수를 고정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러한 활동은 1750년(영조 26) 모든 양정으로부터 균일하게 군포 1필을 징수하는 균역법(均役法) 성립의 기반이 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효종실록(孝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단행본

정연식, 『영조 대의 양역정책과 균역법』(한국학중앙연구원, 2015)

논문

김경란, 「조선 후기 良役政策의 전개와 匠人파악의 변화」(『韓國史學報』 29, 高麗史學會, 2007)
손병규, 「18세기 良役政策과 지방의 軍役運營」(『軍史』 39, 국방군사연구소, 1999)
정만조, 「숙종조 양역변통론의 전개와 양역대책」(『국사관논총』 17, 국사편찬위원회, 1990)
정연식, 「17·18세기 평안도 良役制의 변천」(『韓國文化』 27, 서울대학교 韓國文化硏究所, 2001)
차문섭, 「임란이후의 양역과 균역법의 성립」(『사학연구』 10·11, 한국사학회, 1961)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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