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정오경백편 ()

어정오경백편
어정오경백편
유교
문헌
조선후기 제22대 왕 정조가 『주역』 · 『서경』 · 『시경』 · 『춘추』 · 『예기』에서 긴요한 내용 99편을 추리고 주희의 저술 2편을 덧붙여 엮은 유학서. 어제.
이칭
이칭
오경백편, 오경백편
정의
조선후기 제22대 왕 정조가 『주역』 · 『서경』 · 『시경』 · 『춘추』 · 『예기』에서 긴요한 내용 99편을 추리고 주희의 저술 2편을 덧붙여 엮은 유학서. 어제.
편찬/발간 경위

정조가 직접 선정한 부분들을 해당 경전의 여러 판본을 모아 엄밀하게 교정하여 간행한 것이다. 정조가 이 책을 엮은 목적은 당대인들이 경서를 두루 읽고 쓰면서도 몸으로 체득하지 않는 폐단을 바로잡되, “자신의 독창을 세우지 않고 고인의 설을 따라 밝히며, 넓은 논의에서 핵심을 좇아 간략한 곳으로 돌아간다(述而不作, 由博反約).”는 원칙에 입각한 것이라고 하였다.

간행의 주체는 규장각이었으나, 자료를 영남에 내려 보내 경전에 익숙한 그곳 유생으로 하여금 교정하게 하기도 하였다. 또한, 간행을 위한 글씨는 영남의 서리(胥吏)를 뽑아 베껴 쓰도록 하였는데, 그 까닭은 그곳 서리들의 질박한 서법을 취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영남의 유생과 서리들을 간행 작업에 참여시킨 것은, 당시 영남 지방에 대해 입지를 강화하려는 정조의 정치적 목적을 보이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1794년(정조 18) 간행 사업이 시작되어 1798년에 끝났다. 그 뒤 1908년 휘문관(徽文館)에서 신식 활자를 이용하여 5권 2책으로 다시 간행한 바 있다. 이 책은 간행 당시 일반적으로 『오경백편』이라고 불렸으나 『오경백선(五經百選)』·『어정오경백편』 등의 제목이 보이기도 한다. 『오경백편』에서는 ‘제후벌초(齊侯伐楚)’라고 붙여진 『춘추』의 한 편명(篇名)이 『오경백선』에는 ‘소릉지맹(召陵之盟)’이라고 되어 있는 것 외에 차이는 없다.

서지적 사항

5권 5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내용

맨 앞에 총 목차가 실려 있고, 편명 밑과 본문의 윗부분에 약간의 주석이 붙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수 기록이 없다. 권1에 『주역』의 건(乾)·곤(坤)·태(泰)·대유(大有)·복(復)·계사전상하(繫辭傳上下)·서괘전상하(序卦傳上下), 권2에 『서경』「우서(虞書)」의 요전(堯典)·순전(舜典)·대우모(大禹謨)·고요모(皐陶謨)·익직(益稷), 「하서(夏書)」의 우공(禹貢), 「상서(商書)」의 탕고(湯誥)·반경상중하(盤庚上中下)·열명상중하(說命上中下), 「주서 周書」의 홍범(洪範)·소고(召誥)·무일(無逸)이 수록되어 있다.

권3은 『시경』에서 발췌한 것으로, 「국풍(國風)」의 관저(關雎)·갈담(葛覃)·작소(鵲巢)·채번(采蘩)·곡풍(谷風)·간혜(簡兮)·정지방중(定之方中)·기욱(淇奧)·맹(氓)·치의(緇衣)·여왈계명(女曰鷄鳴)·계명(鷄鳴)·벌단(伐檀)·척호(陟岵)·실솔(蟋蟀)·소융(小戎)·겸가(蒹葭)·비풍(匪風)·하천(下泉)·칠월(七月)·동산(東山), 「소아(小雅)」의 녹명(鹿鳴)·황황자화(皇皇者華)·벌목(伐木)·천보(天保)·출거(出車)·남산유대(南山有臺)·유월(六月)·거공(車功)·길일(吉日)·학명(鶴鳴)·백구(白駒)·사간(斯干)·무양(無羊)·대동(大東)·초자(楚茨)·신남산(信南山)·보전(甫田)·대전(大田)·빈지초연(賓之初筵), 「대아(大雅)」의 문왕(文王)·대명(大明)·면(綿)·역복(棫樸)·한록(旱麓)·사제(思齊)·황의(皇矣)·영대(靈臺)·생민(生民)·행위(行葦)·기취(旣醉)·공류(公劉)·억(抑)·숭고(崧高)·증민(烝民)·한혁(韓奕)·강한(江漢), 「송(頌)」의 유천지명(維天之命)·천작(天作)·사문(思文)·풍년(豊年)·경지(敬之)·경(駉)·반수(泮水)·비궁(閟宮)·나(那)·장발(長發)이 실려 있다.

권4에는 『춘추좌씨전』의 취고대정(取郜大鼎)·제후벌초·성복지전(城濮之戰)·초자문정(楚子問鼎)·필지전(邲之戰)·안지역(鞍之役)·언릉지역(鄢陵之役)·목권여진(穆權如晋)·제후벌제(諸侯伐齊)·계찰관주악(季札觀周樂)을 실었고, 권5에는 『예기』에서 「악기(樂記)」·「대학(大學)」·「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중용(中庸)」·「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를 수록하였다. 「대학장구서」와 「중용장구서」는 주희의 저술로, 그가 학문의 정통을 이었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추가한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무엇보다도 정조 개인과 당시의 문화 사업의 성격을 보인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한편, 간행 과정에서 정조가 서체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그가 추진하였던 문체반정(文體反正)과 연결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나아가 정조의 문화 사업이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음을 고려할 때, 당시의 정치적 동향을 이해하는 데에도 간접적인 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군서표기(群書標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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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정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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