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1월약초극장(若草劇場:지금의 스카라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이병목(李丙穆)이 촬영을 맡고 나웅(羅雄)·윤북양(尹北洋)·박진경(朴眞慶)·박학(朴學)·이현(李鉉) 등이 출연하였다.
1930년대 말 당시 조선총독부의 영화정책 및 검열은 더욱 가혹해졌기 때문에 전통을 추구하는 전통파 영화인들은 진취적인 자세를 잠시 중지하고 보수주의의 정신으로 한국영화의 영토를 지키면서 일본영화의 세력과 이에 추종하는 기회주의적인 편승파에 저항하였다.
강화된 검열이나 정책적 압력을 모면하는 길은 먼저 현실에 입각한 소재를 가급적 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무난한 문예작품을 택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전통파들은 상징주의·낭만주의·정서주의·비유주의와 같은 현실도피적인 주제를 가지고 문예적인 스타일을 갖춘 영화들을 만들었다. 이 작품도 그러한 조류의 하나로서 제작되었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연이은 흉어(凶漁)로 곤경에 빠져 있는 어부 춘삼은 수전노인 용운의 빚 독촉에 못견디어 고기를 잡으러나갔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용운은 빚 대신 춘삼의 딸 인순을 첩으로 데려가려고 온갖 협박을 한다.
이 무렵 서울에서 귀향한 용운의 아들 철수는 인순을 꾀어 서울로 올라가 버린다. 인순은 사랑하는 천석과도 헤어져 오직 돈을 벌어 어머니의 생계를 꾸려주기 위하여 철수를 따라간 것이다. 그런데 상경하고 보니 철수의 모든 약속은 거짓이었다. 절망에 빠져 기로에 선 인순은 모든 것이 숙명이라고 체념하고 조용히 제2의 인생길을 찾아간다.
이 작품은 독일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돌아온 안철영의 귀국 제1회작으로서, 영화 자체는 짙은 한국적인 토속성을 담은 작품이었으나, 제공회사인 일본 송죽영화사가 한국의 풍속·감정·생활 등 문화적 전통을 이해하지 못한 채 편집·녹음·음악을 맡아서 완전 실패에 가까운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영화탄압의 시기에 토속성 짙은 문예영화를 시도하였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