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단종복위사건이 사전에 발각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 중인 노산군(魯山君: 단종)에게 1457년 사약이 내려질 때 책임을 맡은 의금부도사였다.
영월에 이르러 사약을 받들고 노산군 앞으로 나아가려 하였으나 감히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렸다.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재촉하자 하는 수없이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을 때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단종을 항상 곁에서 모시던 공생(貢生: 관가나 향교에서 심부름하던 통인과 같은 사람)이 단종을 죽이는 일을 담당하였다. 당시 왕방연이 괴로운 심정을 토로한 시가 전한다.
『장릉지(莊陵誌)』에는 금부도사(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가 밤에 굽이치는 여울의 언덕 위에 앉아 슬퍼하면서 노래를 지었는데, 그 뒤 1617년에 김지남(金止男)이 금강에 이르러 여자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한문으로 단가를 지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