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사웅(士雄). 일명 시걸(時傑)이라고도 한다. 증조는 왕지덕(王地德)이고, 할아버지는 왕종의(王宗義)이며, 아버지는 경흥도호부사 왕무(王懋)이다.
1534년(중종 29)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을 거쳐 1545년(명종 즉위)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으며 1546년(명종 1) 경성판관, 1550년 비변사 낭청이 되었다. 이듬해 자산군수(慈山郡守)가 되었고, 사인(舍人)·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나기 전인 1551년(명종 6)에 함경도어사로 나가 있으면서 장계를 올려 보우(普雨)가 안변황룡사(黃龍寺)·석왕사(釋王寺) 등지를 옮겨 다니면서 계림군(桂林君)을 숨겨주었다고 하였다.
당시에는 조작한 말이라고 무시되었으나, 뒤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고 조정 내부에서 배불의 상소가 잇따라 있게 되자, 이때의 장계가 보우의 승직을 삭탈시키는 데 큰 구실이 되었다. 일찍이 이황(李滉)·노수신(盧守愼)·홍섬(洪暹) 등 당대의 명유와 교유하였으며, 문장·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