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사무를 관장하던 관청은 1882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우정사(郵程司), 1884년 우정총국(郵政總局), 1893년 전우총국(電郵總局), 1894년 공무아문 역체국(驛遞局), 1895년 농상공부 통신국(通信局) 등으로 이어져 왔다. 근대적 우편제도를 도입한 우정총국이 갑신정변으로 폐지되고, 그 뒤로 10년이 넘게 지나 비로소 우체사를 설립하면서 우편사업이 재개되었다. 우체사는 통신국과 별도로 현장의 실질적인 우편사무(접수와 배송 등)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현업관서로 출발했다.
우체사의 조직과 인원은 사장(司長) · 우체주사(郵遞主事) · 우체기수(郵遞技手) · 우체기수보(郵遞技手補)가 있고, 우체사업은 국영을 원칙으로 하였다. 1896년 8월 6일 우체사관제 개정시는 우체사를 1등우체사 · 2등우체사 등 2개사로 구분하였고, 1897년 3월 23일 개정시는 총사 · 1등우체사 · 2등우체사 등 3개사로 구분하였다. 1897년 12월 23일 임시우체사규칙을 반포함에 따라 ‘임시우체사’ 제도가 도입되었다. 1900년 7월 25일 개정시는 우체사를 통신원 예속으로 하였다.
우편물의 취급종류는 제1종은 서신, 제2종은 관보, 제3종은 서적 · 인쇄물 · 사진 · 그림 · 견본 및 농산물의 씨앗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요금은 균일요금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종류별 요금은 제1종이 중량 2돈중[錢重]마다 1전이며, 제2종 1호의 경우를 보면 중량 1냥 6돈중마다 5푼(分)이고, 제3종은 중량 8돈중마다 1전이었다.
특수취급의 범위와 요금은 등기가 3전, 무료우편(우편사무용)이 있었으며, 요금의 납부방법은 우표로 선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미납과 부족액은 정료(定料)의 2배를 현금으로 수취인에게서 받았다. 우표는 정부에서 4종류를 발행하였는데, 5푼 ·1전 ·2전 5푼 ·5전짜리가 있었고, 취급시간은 상오 7시부터 하오 10시까지이며, 우편물의 배달은 표기거소배달주의(表記居所配達主義)로 1일 2회에서 4회로 늘었다.
1895년 6월 1일 서울과 인천에 설치된 우체사에 이어 그해 8월 10일에는 개성에서도 문을 열었다. 1900년 3월 우체사가 통신원에 편입될 당시 전국의 우체사 수는 38개소로 증설되어 있었다. 이때의 전국적인 집신(集信)은 80만 6408통, 분전(分傳)은 50만 2289통이었다.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서 체결에 따라 일제의 통신권 침탈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우체사는 1906년 7월 27일 통신원이 폐지됨에 따라 그와 함께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