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동문선(東文選)』 등의 문헌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법천사(法泉寺)는 신라 말인 8세기에 산지가람(山地伽藍)으로 세워져 고려시대에 대대적으로 중창(重創)된 사찰이다. 화엄종(華嚴宗)과 더불어 고려시대 양대 종단이었던 법상종(法相宗)의 고승 정현(鼎賢)이 주지를 맡아 법상종 사찰로 번성하였다. 특히 지광국사(智光國師)가 초년(初年)에 수학하고 은퇴하여 머물다 입적(入寂)한 곳이므로, 이 시기가 전성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유방선(柳方善)이 이곳에서 강학(講學)하였으며, 권람, 한명회, 강효문, 서거정 등의 학자들이 여기 모여 시를 읊고 시문을 남겼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전소된 뒤 중창되지 못하였다. 1982년 11월 3일 강원도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8월 31일에 국가지정유산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금당(金堂) 터의 북쪽인 탑비전지(塔碑殿址)와 1086년 건립된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국보, 1962년 지정), 불상광배(佛像光背), 불두(佛頭), 연화문대석(蓮華紋臺石), 용두(龍頭), 석탑재(石塔材) 등이 있고 절터 남쪽 약 800m 지점에는 높이 280㎝로 완전한 형태의 신라시대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있다. 옛 법천사 경내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변 일대에는 민가가 들어서거나 농경지로 변했지만 장대석 석축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승탑[浮屠]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1962년 지정)은 탑비와 나란히 있었으나, 일제 초기 오사카(大阪)로 반출되어 비석만 홀로 남게 되었다. 이 탑은 후에 반환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한국전쟁 당시 포탄을 맞아 탑신 이상이 대파되었다가 복원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용산으로 이전할 당시 옮겨가지 않아 2013년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우측 공터에 있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5차례 시행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건물지 19동과 우물지 3개소, 석축 및 담장유구, 계단지, 금동불입상, 연화대석, 각종 기와류 및 자기류 등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재)강원고고문화연구원이 시행한 2012년 발굴조사에서는 법천사가 가장 번창했던 시기인 고려 중기에 사용되었던 기와류, 자기류, 동전 등이 출토되었으나, 폐사 시기로 추정되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조선시대 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
고려시대의 유력한 두 종단 중 하나였던 법상종의 사찰이자, 뛰어난 고려시대 석조미술 작품을 조성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찰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파악된 가람배치를 통해 고려시대 법상종 사찰의 배치 특성을 파악하게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