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미는 조선 후기에 전세조공물을 쌀로 내도록 하던 제도이다. 조선 후기에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종래의 전세조공물을 쌀로 대신 수취하였다. 전세조공물은 원래 책정한 원공물(元貢物) 외에 중앙 각사에서 필요한 현물을 지방 군현의 전세결에 배정한 공물이었다. 하지만 16~17세기 공물의 폐단이 극에 달하고 본격적인 공물 변통 논의가 시작되자 조선 정부는 원공물과 함께 전세조공물도 대동법의 범주에 포함시켰고, 그 결과 전세조공물은 위미, 위태라는 명목으로 선혜청에 납부되었다. 위미는 수전(水田)에서 징수하는 전세 조공물의 값이다.
조선 전기의 부세 가운데 공물은 국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았다. 공물은 군현 단위로 책정하여 운영되었지만 최종 부담은 민호에서 담당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공물 가운데 전세조공물(田稅條貢物)이라 불리는 명목이 있었다. 전세조공물은 ‘전세소출공물(田稅所出貢物)’ 혹은 ‘전세소납공물(田稅所納貢物)’이라 하여 전세 대신에 무명, 저포, 들기름, 꿀, 모밀 등을 납부하는 것이었다. 이는 본래 군현이 납부할 공물인 원공(元貢)과 구별하기 위하여 전공(田貢)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원공이든 전공이든 현물로 상납되는 공물 수취 체제는 현지에서 생산되지 않는 공물〔불산공물(不産貢物)〕의 분정, 상납 과정에서 발생하는 점퇴(點退)와 방납(防納) 등으로 인하여 점차 위기에 빠졌다. 결국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 직후 종래의 현물공납제를 폐지하고, 이를 지세화(地稅化)하여 공물가를 쌀로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원공은 대동미(大同米)로 거두었지만, 전세조공물은 위미(位米) 또는 위태(位太)의 명목으로 받았다. 위미는 전세조공물로 설정된 수전(水田)에서 징수되고, 위태는 한전(旱田)에서 거두어들였다.
애초 전세조공물은 전세로 마련되는 공물이기 때문에 대동미와 관계없이 민결에서 별도로 수취하여 값을 마련하였다. 이 때문에 대동미로 지급하는 공물가보다 34배 혹은 78배로 값을 높게 책정하여 징수하는 폐단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세조공물을 위미 · 위태로 전환하여 선혜청에서 거두어들였다. 그 결과 경기도 전세조공물을 제외한 강원도 ·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의 전세조공물은 위미 · 위태로 수취되었다. 그중 강원도에는 위태만 분정되었다.
선혜청에서는 다른 공물과 마찬가지로 공물 주인에게 공물가를 지급하여 각사에 공물을 진상하게 하였으며, 선혜청에 납입된 위미와 위태는 불시 용도에 대비하는 자금으로 활용되었다. 영남지역은 위미 · 위태에서 공작미(公作米)로 쓸 양을 떼어놓고 남은 1,168석을 선혜청(영남청)에 상납토록 하였다. 한편 18세기 중엽을 기준으로 강원, 충청, 전라, 경상도 등지에서 징수되는 위미는 1,365석이었다.
위미는 본래 쌀로 내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19세기에 이르러 충청도 제천 · 영춘, 경상도 상주 등에서는 돈으로 납부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