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연행 사절단은 우가장에 도착하면 심양에 있는 성경부에 납부할 방물을 청나라의 압차 혹은 장경에게 인도하고, 조선의 압물종사관과 청어 역관이 함께 심양까지 동행하여 호부에 납부하였다.
그러나 1679년(숙종 5)에 우가장을 지나는 것이 금지되면서 연행 사절단이 직접 심양에 가서 방물을 납부하였다. 이때 방물을 싣고 가던 인마(人馬)는 다시 조선으로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 귀환을 이끄는 임무를 맡았던 사람이 단련사이다. 단련사는 돌아오는 길에 사무역을 벌이고 빈 말에 물화를 싣고 들어왔는데, 이때의 사무역을 단련사후시라고 한다.
후시는 개시(開市)와 상대되는 용어로 비공식적인 무역을 가리킨다. 개시는 중국과의 변경 지역이나 왜관에서 이루어지는 대외 무역을 말하는데, 후시는 개시를 기회로 이루어지는 교역이며, 개시와 후시는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단련사는 심양의 성경부에 세폐와 방물을 바치고 돌아오는 인마를 단속하는 임무를 띤 관원이다. 17세기 이후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의주부, 평안 감영, 평안 병영, 황해 감영, 개성부 등에 무역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무역별장을 파견하여 무역의 이익을 보장해 주었다. 단련사에게도 무역 허가권을 주었다. 단련사에게 무역별장을 인솔하는 책임까지 주자 단련사를 통해 청나라의 수많은 물화가 거래되었다. 이에 심양과 책문에서 구입하는 물화의 수량이 증가하게 되었다.
세폐와 방물을 납부한 뒤에 돌아오는 인마를 통해 단련사가 무역을 하게 되자 여러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무역별장과 각종 상인들을 이끌어야 할 단련사가 도리어 우두머리가 되어 마음껏 매매를 하게 된 것이다.
결국 1789년(정조 13) 단련사를 없애고 방물은 책문에서 수레로 운반하게 하였다. 1806년(순조 6)에는 방물이 책문에 도착하면 청나라에서 고용한 수레로 운반하게 하여 조선 사람이 운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대청무역이 공식 무역인 개시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비공식적인 무역으로 전개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