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일본과의 무역을 1609년(광해군 1) 기유약조(己酉約條)을 체결하면서 재개하였다. 그리고 2년 후인 1611년(광해군 3)에 대마도에서 세견선(歲遣船)을 보내면서 대일 무역이 본격화되었다.
대일 외교가 정상화되면서 조선 정부는 도항해 오는 일본 사신에게 접대비용인 왜료(倭料)를 지급하는 한편, 무역 물품인 구리, 납, 호추, 물소뿔, 명반 등의 대가로 무명을 지급하였다. 이때 지급하던 무명을 공목(公木) 또는 공무목(公貿木)이라고 하는데 총량이 1,121동에 달하였다.
하지만 17세기 전반 일본에서는 목면 생산과 함께 목면 산업이 발달하면서 조선의 무명을 일본 시장 내에서 판매하기가 점차 어려워졌다. 게다가 조선 정부가 지급한 공목의 품질이 떨어져 그 이익률이 감소하자 공무역으로 수입한 목면을 일본으로 가져가지 않고, 왜관에 보관하였다가 조선 상인에게 되파는 역수출을 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무명 수요가 현저하게 감소하는 것과 달리 쌀의 수요는 점차 증가하였다.
일본 300번 가운데 하나인 대마번은 자국 내에서 쌀 수급이 순조롭지 않자 조선 정부가 지급하던 공목을 쌀로 바꾸어 지급하기를 요청하였다. 이를 공목작미(公木作米)라 하며, 줄여서 공작미라고 불렀다. 공작미를 언제부터 왜관에 대어 주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7~18세기 공무역 실태를 기록한 『공목작미등록(公木作米謄錄)』을 살펴보면 공작미가 처음 지급된 시기는 1642년(인조 20)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1651년(효종 2) 차왜 평성부(平成扶)의 요구로 1,121동의 공목 중 300동을 쌀로 바꾼 1만 2,000석의 공작미를 지급하여 주었다.
조선 정부는 공작미 시행 초기에는 지급 시기를 5년으로 제한하였다. 하지만 1656년(효종 7)에 관수왜 귤성세(橘成稅)와 1659년(효종 9)에 귤성반(橘成般) 등이 지속적으로 요청하자 결국 1660년(현종 1)에 공작미의 연한을 다시 5년으로 늘리고, 공작미 수량도 공목 400동으로 확정하였다. 귤성반은 ‘5년 한정’이라는 제약을 두지 말 것을 다시 요구하였으나 조선 정부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대마번은 5년마다 재판차왜(裁判差倭)를 파견하여 약조를 갱신하였으므로 400동의 공작미는 항례가 되었다. 1660년(현종 1)부터 조선 정부는 매년 400동을 12두로 환산한 1만 6,000석의 공작미를 동래부 왜관으로 납부하였다.
공작미는 쌀 부족 현상을 타개하고자 하는 대마번과 공목의 품질 문제를 무마시키기 위한 조선 정부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이었다. 또 공작미는 조선 후기 대마도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던 무역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