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령개시는 조선 후기에 청국과 무역하기 위하여 함경도 회령에 개설된 무역 시장이다. 1638년(인조 16)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양국 관원의 감시 아래 공무역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영고탑(寧古塔) · 오라(烏喇) 및 봉천 · 북경상인까지 몰려와 밀무역이 성행하였다. 회령개시에서는 소, 무명, 베, 백지, 솥, 쟁기, 소금 등이 주된 교역 물품이었다. 1884년(고종 21)에 길림여조선수시무역장정(吉林與朝鮮隨時貿易章程)을 체결한 뒤 자유무역시장으로 변모하였다.
회령개시는 처음에는 영고탑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이후에 야춘인이 참여하였고 17세기 후반에는 오라인도 등장하게 되었다. 참여하는 청나라 사람이 증가하면서 조선 정부에서는 청나라와 논의 끝에 정식을 마련하였다. 정식에 따라 참가할 인원과 우마의 수가 정해졌다.
그러나 정식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영조는 함경도 지역 개시의 폐단을 조사하여 1769년(영조 45)에 정례를 수립하였다. 이를 「함경도회원개시정례」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예단의 규모를 정하고 함경도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이후 또다시 늘어나자 1851년(철종 2)에 정례를 개정하여 수종 인원을 재정비하였다.
회령개시는 두만강변 이북에 자리한 청국인들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무역 시장이었다. 그러므로 함경도 백성들의 부담이 적지 않았다. 영조 연간에 만들어진 정례는 이를 줄여주기 위한 조치였으며, 1882년(고종 19)에 개시가 철폐될 때까지 두만강변의 국경을 안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