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송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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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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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일본의 대마도에서 일년에 8회씩 정기적으로 조선에 왕래한 무역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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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 일본의 대마도에서 일년에 8회씩 정기적으로 조선에 왕래한 무역사절.
내용

임진왜란에 의해 단절된 조○일 양국 간의 통교가 1609년(광해군 1) 기유약조(己酉約條)로 재개되면서 대마도에서는 대마도주 세견선(歲遣船) 20척, 수직인선(受職人船) 5척, 수도서선(受圖書船) 5척에 대해 매년 1회씩의 통교를 허용했는데, 이들을 ‘연례송사(年例送使)’라 한다.

연례송사는 1637년 ‘겸대(兼帶)’ 제도가 실시되면서 모두 8개의 사절단으로 나뉘어 매년 1·2·3·6·8월 중에 각각 순번에 의해 정기적으로 도항하게 되면서, ‘연례팔송사(年例八送使)’라고 불렀다.

대마도주세견선이란 대마도주가 1년에 보낼 수 있는 무역선으로 모두 20척이다. 이는 보통의 세견선 17척과 특송선 3척으로 구성하였다.

수직인선은 임진왜란 후 국교 재개의 공로를 인정하여 상호군(上護軍)과 부호군(副護軍)의 관직을 받은 5인(藤永正·世伊所·馬勘七·平智吉·平信時)에게 1년에 한번 조선에 왕래가 허가된 선박이다. 수직인이 죽은 뒤 1635년부터는 ‘중절선(中絶船)’으로 도항하였다.

수도서선은 대마도인 가운데 조선에 특별히 청하여 도서(圖書)를 발급받은 자가 그 도서를 서계에 찍어 만든 도항증을 사용한 배를 말한다. 수도서선은 이정암송사·유천송사·아명송사·만송원송사·유방원송사 등 5척이다.

‘이정암송사(以酊庵送使)’는 임란 후 국교 회복에 노력했던 승려 현소(玄蘇)에게 허가된 배로 1611년부터 도항하였다. 이정암이란 현소가 대마도 이즈하라(嚴原)에 지은 암자로 현소가 태어난 해인 정유(丁酉)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소의 사망 뒤에는 그의 제자 현방(玄方)에게 계승되었고, 국서개작 사건으로 현방이 유배되자, 1638년부터 대마도주 종씨가 계승했다.

‘유천송사(柳川送使)’는 국교 회복에 공로가 있던 유천조신(柳川調信)과 유천경직(柳川景直) 부자에게 주었던 배로 국서개작 사건 폭로 후, 1640년부터는 ‘부특송사(副特送使)’라는 명칭으로 도항하였다.

‘아명송사(兒名送使)’는 대마도주의 아들이름으로 발급된 도서를 찍은 서계를 지참하고 도항하는 배로 1611년 대마도주 종의지의 아들 종언삼(宗彦三)의 배인 ‘언삼송사’와 뒤에 종언삼의 아들 종언만(宗彦滿)에게 허가된 ‘언만송사(彦滿送使)’를 말한다.

‘만송원송사(萬松院送使)’는 1615년 대마도주 종의지가 죽자, 그의 국교재개 노력에 대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1622년 조선에서 도서가 발급된 것이다. 만송원이란 종의지의 법명이 붙은 보리사의 이름이며 그의 제사를 돕기 위해 도서를 발급해준 것이다.

‘유방원송사(流芳院送使)’란 1605년 죽은 유천조신의 법명을 붙인 것으로, 1622년부터 만송원송사의 예에 따라 도서가 발급되어 사선이 도항했다.

이들 연례송사선의 목적은 물론 무역이었지만, 규정상 세견선마다 사신이 동승하여 외교적인 절차를 밟아야 하였다. 또, 입항에서 출항에 이르기까지 별도의 외교의례를 거쳐야 했다. 따라서 모든 사송선이 초량왜관에 입항하면 사송선의 책임자인 정관(正官)은 동래부사와 부산첨사에게 도해(渡海 : 바다를 건너옴)인사를 하는데 이것을 다례의(茶禮儀)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국왕을 향해 숙배(肅拜 : 왕에게 공손히 절하는 예)를 바쳐야 하였다.

그러나 모든 세견선에 정관이 승선하여 조선측 접대의 부담이 늘자, 1635년부터는 한 세견선의 정관이 다른 세견선의 정관을 겸하는 겸대(兼帶) 제도를 실시하였다. 즉 제1특송선의 정관이 제2특송선과 제3특송선을 겸대하게 하고, 세견 제4선이 세견 제5선 이하 세견 제17선에 이르기까지 겸대하게 하여 15척에 대한 정관의 접대 부담을 줄였다.

연례송사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된 교역 형태는 진상(進上)·회사(回賜)·구청(求請)·공무역(公貿易)·개시(開市)의 다섯 종류가 있었다. 모든 사송선은 매 한 척마다 다섯 종류의 교역을 모두 행하였다. 이중 진상·회사·구청·공무역은 외교적인 절차를 밟아야 했고, 개시는 왜관에서 사무역의 교역 방법으로 행해졌다.

당시 일본과의 교역에서 취급된 물품을 보면, 진상품으로는 후추(胡椒)·명반(明礬)·단목(丹木) 등 동남아시아산 물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외에 대화진주(大和眞朱)·문지(紋紙)·채화태대현갑(彩畵台臺硯匣)·채화중원분(彩畵中圓盆)·적동명로(赤銅茗爐) 등 일본공예품이 약간 있었다.

한편 조선으로부터의 회사품은 인삼·호피(虎皮)·표피(豹皮)·백면주(白綿紬)·흑마포(黑麻布)·모시·백면포(白綿布)·황모필(黃毛筆)·진묵(眞墨)·응자(應子)·화석(花席) 등 12종류였다. 그리고 일본측에서 원하는 물품을 주는 구청으로 28종류가 있었다.

그 품목을 보면, 인삼·호피·표피·호육(虎肉)·호담(虎膽)·견(犬)·응자(應子)·명주·모시·흑마포(黑麻布)·백목면(白木棉)·화석(花席)·기름종이·필·먹·벼루·연적·칼·마저(馬箸)·부채·다리미·꿀·녹두가루·율무·잣·개암·호두·밤·대추 등으로 동물·식물·약종류·직물·일용품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채로웠다.

또한 공무역이란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는 동(銅)·납(鑞)·단목(丹木) 등을 조선 정부가 목면(木綿)을 주고 사들이는 방식으로 이를 공목(公木)이라 하였다. 사들이는 물품 가운데에는 때로 후추·명반(明礬)·흑각(黑角) 등 동남아산 물품과 일본 공예품 등도 있었다.

연례팔송사의 배에 승선한 정관들은 모두 예조와 동래부사 앞으로 보내는 서계(書契)를 지참하여 진상사절(進上使節)의 형식을 갖추도록 하였다. 이들이 왜관(倭館)에 머무는 동안 규정에 따라 각종의 연회가 열렸고〔宴享〕, 조선으로부터 식사가 제공되었다.

또 팔송사에게는 왜관 체재 기간 동안 정해진 체류 기간에 따라 식량과 과해료(도항수당)·육물(陸物 : 배의 수리물자)이 주어졌다. 그러나 겸대(兼帶)와 환미(換米)의 제도가 실시되면서부터는 이들 물품대신 목면이나 쌀로 일괄 받은 뒤, 왜관에서 사무역을 통해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해 갔다.

개시란 왜관의 개시대청(開市大廳)에서 조선상인과 일본인(사신·관리·상인 등)간에 이루어진 사적인 거래로 품목이나 수량에 대하여는 금·은이나 조복(朝服) 등 특수한 것을 제외하고 제한이 없었다. 개시일은 5일에 한번씩 월6회로 하였다.

이와 같이 사무역에서 거래된 물자는 진상이나 공무역과는 달라서 정품(定品)·정액제(定額制)가 아니기 때문에 시장이 열릴 때, 무역참가자의 수급관계에 따라 다르게 결정되었다. 그러나 참가자 자체도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고, 거래장부에 대한 기록도 없기 때문에 연간 거래품목이나 가격·수량 등의 동향에 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참고문헌

『근세한일외교비사』(손승철, 강원대출판부, 1988)
『조선시대 한일관계사연구』(손승철, 지성의 샘, 1994)
『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田代和生, 創文社, 1981)
집필자
손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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