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위봉사 보광명전 ( )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 정측면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 정측면
건축
유적
문화재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소양면 위봉사에 있는 조선후기 에 중수된 사찰건물. 불전. 보물.
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소양면 위봉사에 있는 조선후기 에 중수된 사찰건물. 불전. 보물.
개설

197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위봉사는 추줄산(위봉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서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창건 또는 중창하였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위봉산성과 행궁(行宮)을 수호하는 역할을 지닌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사찰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로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위상을 지니기도 하였다. 보광명전은 위봉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집이다.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상을 모시고 있다.

역사적 변천

위봉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위봉사사법」 등 일제강점기 기록들에 의하면 604년(백제 무왕 5) 서암(瑞巖)대사가 위봉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한편 『범우고(梵宇攷)』(1799년)와 「극락전중건기(極樂殿重建記)」(1868년) 등에는 최용각(崔龍角)이 세 마리의 봉황이 날아드는 것을 보고 절을 창건하였다고 하며, 1359년(공민왕 8) 나옹화상이 중창하고, 1466년(세조 12)에 선석(善釋)과 석잠(釋岑) 두 스님이 중수(重修)했다고 한다. 그러나 위봉사의 연혁을 기록한 것 중에 가장 빠른 「추줄산위사사적사병서(崷崒山威寺事蹟詞幷序)」(1718)에서는 나옹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위봉사는 전사(殿舍)가 28동이 있었고 소속 암자도 10여 개에 달하는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봉사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1675년(숙종 원년)에는 전란에 대비하여 위봉산성이 축조되고 전주 경기전에 모신 태조 어진을 보호할 목적으로 행궁(行宮)이 건립되었다. 이후 위봉사는 산성과 행궁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게 되면서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사찰이 되었다. 1868년(고종 5)에는 포련(布蓮) 스님이 60여 칸에 이르는 불전을 중수하였는데 이때 관음전(요사)이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30본산 중 하나로서 금산사와 송광사 등 52개 말사를 관장하기도 했으나 한국전쟁 때 황폐화되었다. 위봉사는 1986년부터 여러 건물들을 새로 건립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위봉사 보광명전은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암막새에 1673년(현종 14)을 알리는 글씨가 있어 적어도 그 이전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38년(헌종 4)에는 중수하면서 ‘보광명전(普光明殿)’이라 쓴 현판을 걸었다. 이후 1978년부터 2009년에 걸쳐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내용

위봉사는 위봉산성 서문을 지나 위봉폭포로 가는 산 중턱에 넓게 터를 닦고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천왕문, 지장전(봉서루), 보광명전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보광명전 주변으로 관음전(요사), 나한전, 심검당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보광명전 뒤쪽 언덕 위에는 삼성각과 선원, 요사채가 자리하고 있다.

위봉사 보광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맞배집으로 자연석을 허튼층쌓기 한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민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세웠다. 창호는 정면의 경우 매 칸마다 3짝 띠살문을 설치하고 측면에서는 전퇴 부분에만 외짝 띠살문을 냈다. 배면은 모든 칸에 2짝 판문을 달았다.

공포는 내외 3출목 형식이다. 첨차는 양쪽 끝을 경사지게 깎고 하부는 둥글게 처리한 교두형(翹頭形)이다. 제공은 5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1·2·3제공은 살미(山彌)가 앙서형(仰舌形)인데 앙각이 짧고 힘이 있어 조선 초기의 모습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 4제공은 연꽃과 봉황을 조각하였으며, 5제공은 운공(雲工)으로 꾸몄다. 제공은 내부에서 판형(板形)으로 일체화시켰는데 연봉오리와 덩굴줄기를 초각하여 장식화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가구구조(架構構造)는 1고주 5량 형식이다. 정면은 기둥간격을 모두 같게 하였고 측면은 가운데 칸만 넓게 하고 좌우 협칸은 가운데 칸의 1/2 정도로 좁게 설정하였다. 그리고 고주는 측면 뒤쪽 기둥열에 맞춰 세웠는데 이러한 수법은 고주가 직접 종보와 중도리를 받을 수 있어 구조적으로 안정감을 취할 수 있다. 또한 예불을 위한 공간도 넓게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추녀 하부에는 활주를 세워 받쳤다.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이다. 천장은 2단의 우물천장으로 꾸몄는데 단청 채색이 잘 남아 있다. 내부 바닥에는 현재 마루가 깔려 있으나 마루 밑에서 전돌 조각이 발견되었음을 볼 때 본래는 전돌을 깔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단 위에는 운룡(雲龍)과 여의주로 장식한 정(丁)자형 닫집을 만들어 장엄하였다.

특징

위봉사 보광명전은 평면 구성과 공포 배열 방법이 특색 있다. 공포는 정면의 경우 매 칸마다 2조의 주간포(柱間包)를 배열하였다. 그러나 배면은 어칸에 2조, 좌우 협칸에는 1조만 배열하였다. 측면에서도 어칸에는 2조의 주간포를 설치하였으나 협칸은 주간포를 생략하였다.

특히 이 건물은 조선 중기 이후의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평면 구성과 가구 구조, 충량의 형태와 치목수법, 귀공포의 간략한 처리 방법, 공포의 형태와 동일한 내외 출목 수, 서까래의 치목 수법 등에서 조선 초기의 다포계 건축수법도 나타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 다포계 건축물의 수법을 따르면서 부분적으로는 조선 초기 다포집의 건축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 등 조선시대 불전 연구에 있어 소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건축문화재 전북편』(홍승재, 기문당, 2005)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 정밀실측조사보고서」(문화재청, 2012)
「위봉사 보광명전」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의 고건축』14, 1992)
집필자
홍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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