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금산(金山)이다.
무예가 뛰어나 사량만호(蛇梁萬戶)가 되고, 1440년(세종 22) 지자성군사(知慈城郡事)를 거쳐, 1443년 의주목사가 되었다. 1449년 판회령도호부사를 역임하고 세종 때에는 북진개척 및 수비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1452년(문종 2)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3년(단종 1) 중추원부사·행첨지중추원사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제사·경상우도도절제사로 있다가, 세조가 즉위한 뒤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이 되었다.
이후 다시 경상우도병마절제사로 나선군(羅船軍)을 조성, 제포(薺浦)·지포(知浦)·옥포(玉浦)·나포(羅浦) 등지를 잘 수비하였고, 이어 전라도처치사로 재직중 죽었다.
충실한 무신일 뿐 아니라 시문에도 조예가 깊어, 신숙주(申叔舟)가 그의 시권(詩卷)에 서(序)를 붙였으나 현재 별책으로는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