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백(淳伯), 호는 삼산(三山). 안동 출신. 아버지는 유석구(柳錫龜)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이천린(李天麟)의 딸이다.
1729년(영조 5) 생원시를 거쳐 173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오랫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749년에 성균관전적을 거쳐 자인현감(慈仁縣監)이 되어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듬 해 홍문록에 올랐으나 대간직을 거치지 않았다는 지평 서해조(徐海朝)의 비판을 받아 이름이 삭제되었다.
1751년 3월 안동에 귀향해 윤광소(尹光紹)와 함께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실시하고, 여강서원(廬江書院)에서 회강(會講)하였다. 1752년 정우량(鄭羽良)의 천거로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했고, 그 뒤 수찬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53년 다시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754년 필선이 되었고, 이 때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보도에 능력을 발휘해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같은 해 수찬·사간을 거쳐 교리에 임명되었다가, 통천군수로 나가서는 백성의 진휼에 힘썼다.
1756년 원인손(元仁孫)과 채제공(蔡濟恭)의 추천으로 부교리가 되어 조정에 돌아온 뒤 왕의 특명으로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758년 춘천현감에 부임하였다. 1760년 형조참의·동부승지·우부승지·판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그 뒤 대사간·호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젊어서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했고, 천문(天文)·지지(地志)·음양(陰陽) 등을 비롯해 병률(兵律)·도가(道家)에 깊이 침잠했으나, 유학의 본지는 사서삼경에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깊이 탐구하였다.
경학에 능하고 여러 학자들의 주석에도 밝아 으뜸가는 경연관으로 영조와 여러 신하들의 신임을 받았다. 문집으로 『삼산문집(三山文集)』, 저서로 『역해참고(易解參攷)』·『하락지요(河洛持要)』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