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 ()

촌은집
촌은집
한문학
인물
조선시대 『촌은집』을 저술한 시인.
이칭
응길(應吉)
촌은(村隱)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45년(인종 1)
사망 연도
1636년(인조 14)
본관
강화(江華)
정의
조선시대 『촌은집』을 저술한 시인.
개설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 아버지는 종7품인 주1 유업동(劉業仝)이고 어머니는 배씨(裴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으며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으로 나가 싸운 공으로 선조(宣祖)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았다. 또 중국 사신들의 잦은 왕래로 호조(戶曹)의 비용을 모두 쓰게 되자 그가 계책을 일러주었다고 한다.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사받았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李爾瞻)이 모후(母后)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내쫓아 주2으로 강등시키려고 그에게 상소(上疏)를 올리라 협박했으나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른 뒤에 그 절의를 높이 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를 올려주었고, 80세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 받았다.

그는 당시 같은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하였던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했다. 이 모임에는 박계강(朴繼姜) · 정치(鄭致) · 최기남(崔奇男) 등 중인신분을 가진 시인들이 참여했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었던 남언경(南彦經)에게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장례의식에 특히 밝았으므로 나라의 큰 장례나 사대부가의 장례를 예법에 맞게 치르도록 지도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唐詩)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허균(許筠)『성수시화(惺叟詩話)』를 살펴보면, 유희경을 천인으로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았다.

천민 출신이나 한시를 잘 지어 당시의 사대부들과 교유했으며 자기 집 뒤의 시냇가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침류대(枕流臺)’라고 이름 짓고 그곳에서 유명 문인들과 시로써 화답했다. 그때에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아 『침류대시첩(枕流臺詩帖)』을 만들었다.

문집으로 『촌은집(村隱集)』3권이 전하며 그 밖의 저서로 『상례초(喪禮抄)』가 있다.

상훈과 추모

아들 유일민(劉逸民)의 원종(原從: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공신)으로 인하여 자헌대부한성판윤(資憲大夫漢城判尹)에 추증됐다.

참고문헌

『촌은집(村隱集)』
『상례초(喪禮抄)』
『택당집(澤堂集)』
『어우야담(於于野譚)』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희조질사(熙朝軼事)』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둔, 종칠품 문관의 품계. 각 관아의 직장(直長), 육조(六曹)의 명률(明律)ㆍ산사(算士), 춘추관의 기사관, 내수사의 전회(典會), 내시부의 상설(尙設)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2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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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강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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