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민헌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전라도도사, 형조정랑, 평안도절도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익세(翼世)
태비(苔扉)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2년(명종 17)
사망 연도
1628년(인조 6)
본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주요 관직
전라도도사|형조정랑|장령|내섬시정(內贍寺正)|평안도절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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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전라도도사, 형조정랑, 평안도절도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익세(翼世), 호는 태비(苔扉). 윤섭(尹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지함(尹之諴)이다. 아버지는 호조좌랑 윤엄(尹儼)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주(金澍)의 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8년(선조 21) 생원시와 진사시 두 시험에 합격하여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그 이듬해 전적이 된 뒤 형조좌랑을 거쳐, 1612년 전라도도사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형조정랑으로 춘추관기주관을 겸임하였고, 광해군의 난정이 계속되자 외직을 자청하여 괴산군수로 나갔다가 곧 파직되었다. 1617년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으로 재기용되어 그 해 가을 사성에 올랐으나, 부당한 인사라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1618년 대동찰방(大同察訪)이 되었으나 얼마 뒤 파직당하였으며, 이때부터 안산(安山) 선묘하에 퇴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군자감정에 임명되고, 장령·내섬시정(內贍寺正)을 거쳐 평안도절도사로 나갔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의에 이르러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안산으로 돌아와 죽었다.

자질과 성품이 순정(純正)하고, 일을 당하여 스스로 지킬 줄 알았으며, 경사(經史)에 밝고 시문에 능하였다. 특히, 조맹부(趙孟頫)를 사숙(私淑)하여 해서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전고대방(典故大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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