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익세(翼世), 호는 태비(苔扉). 윤섭(尹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지함(尹之諴)이다. 아버지는 호조좌랑 윤엄(尹儼)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주(金澍)의 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 21) 생원시와 진사시 두 시험에 합격하여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그 이듬해 전적이 된 뒤 형조좌랑을 거쳐, 1612년 전라도도사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형조정랑으로 춘추관기주관을 겸임하였고, 광해군의 난정이 계속되자 외직을 자청하여 괴산군수로 나갔다가 곧 파직되었다. 1617년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으로 재기용되어 그 해 가을 사성에 올랐으나, 부당한 인사라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1618년 대동찰방(大同察訪)이 되었으나 얼마 뒤 파직당하였으며, 이때부터 안산(安山) 선묘하에 퇴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군자감정에 임명되고, 장령·내섬시정(內贍寺正)을 거쳐 평안도절도사로 나갔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의에 이르러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안산으로 돌아와 죽었다.
자질과 성품이 순정(純正)하고, 일을 당하여 스스로 지킬 줄 알았으며, 경사(經史)에 밝고 시문에 능하였다. 특히, 조맹부(趙孟頫)를 사숙(私淑)하여 해서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