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아버지는 고려 동지밀직 윤방안(尹邦晏)이다.
1383년(우왕 9)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지냈다.
조선 개국 이후 조준(趙浚)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 재지(才智)를 인정받아, 예조정랑 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경력사도사(經歷司都事)로 천거된 뒤, 교서소감 겸 경력사간의대부(校書少監兼經歷司諫議大夫)·산기상시(散騎常侍)의 직을 함께 맡았다.
그러나 1399년(정종 1)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여, 산기상시직과 경력사간의대부의 직을 함께 겸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간의대부의 직은 파하였다. 같은 해 11월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이 삼방(三房)으로 분리되자 거기에 소속하게 되었다. 1400년 조준이 실각하자 파직되었다가, 태종 즉위 후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가 되었다.
그 때 궁궐을 쌓는 역사를 중지하자고 상소하였다가 파직당하고 하옥되었다. 1402년(태종 2)에 다시 복직되어 형조·호조의 전서를 지냈으며, 안주·이성(泥城)·강계 지방의 찰방으로 나갔다. 1404년 경기관찰사로 있을 때, 위징십점소(魏徵十漸疏)를 판에 새겨 병풍을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이어 대언(代言)·예문관제학·강원도관찰사·관마제조(官馬提調) 등을 역임하였다. 1410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서 명나라 태조의 북정(北征)을 치하하러 명나라에 다녀왔다. 성격이 강직하고 과감하였기 때문에 관력을 통하여 파직당한 경우가 가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