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흥삼군부는 조선 전기 군령(軍令)과 군정(軍政)을 총괄한 관서이다. 삼군부라고 불렀다. 오군체제를 삼군체제로 바꾸어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였는데 조선 건국 이후 이름을 바꿨다. 고려의 2군 6위의 8위와 태조의 친위부대 의흥친군위의 좌·우위를 합해 10위를 중·좌·우의 3군으로 나누어 통솔하였다. 군사 최고기관이었으나 10위를 통할할 뿐 군사력은 절제사 등에 영속(領屬)되어 있었다. 사병을 혁파되고 병권을 분할 통솔하기 위한 의도에서 성립한 기구라고 할 수 있다. 1401년 승추부(承樞府)로 개편되고 삼군에 각각 도총제부를 두어 분리되었다가 병조에 합병되었다.
흔히 삼군부로 약칭해서 부른다. 고려 말기인 1391년(공양왕 3) 종래의 오군체제를 삼군체제로 바꾸어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두었는데, 이를 조선 초기인 1393년(태조 2) 9월에 개칭한 것이다.
이 관서가 설치되면서 태조의 친위 부대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의 좌 · 우위와 고려시대 이래의 2군6위의 8위를 합해 3군10위를 통솔하였다. 또한 동시에 고려 이래 상장군 · 대장군의 회의처였던 중방(重房)을 폐지하면서 군사의 중추 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설치 당시 삼군부는 10위를 중 · 좌 · 우의 3군으로 나누고 각 군마다 종친 · 대신들을 절제사(節制使)로 임명해 이를 통할하게 하였다. 또, 중앙군 이외에도 각 도의 상번 군사로 편제된 시위패(侍衛牌)를 속하게 하였다.
삼군부가 군사 최고기관의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개국에 공로가 있던 정도전(鄭道傳)이 판사에 임명되어 단일 책임자에 의한 관서(官署)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삼군부는 군사력이 거의 없고 10위가 그 통할을 맡을 뿐, 사병(私兵)이 혁파되기 전까지 이른바 삼군은 사실상 각 절제사에 영속(領屬)되어 있었다.
따라서 군령 · 군정기관이라고 하나 중앙군을 이루는 무반(武班) 군사들을 통할하는 데 불과하였다. 소속 기관으로는 진무소(鎭撫所)와 사인소(舍人所)가 있었다. 진무소는 군령기관의 참모부와도 같은 위치에 있었다.
원칙적으로 삼군부는 10위를 통할하는 한편, 번상 숙위하는 각 도 주(州) · 군(郡)의 병사인 시위패를 진무소에 소속시켰다. 이러한 제도는 절제사들의 사적 영속 관계에 있던 시위패를 규제한다는 의도에서 설행되었으나, 사병 혁파 이전의 목표였을 뿐 실효는 없었다. 그리고 삼군부와 지방군의 관계도 별다른 유기적 영속 관계가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또 하나의 참모기관인 사인소가 설치되었다. 이는 대소 양반의 자서제질(子婿弟姪)을 수용해 경사(經史) · 율문(律文) · 산수(算數) · 사어(射御) 등을 가르쳐 숙위에 충당하고, 동시에 자질에 따라 발탁, 등용하기 위해서였다.
삼군부는 새로이 광화문의 남쪽에 있었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동쪽 맞은편에 청사를 마련해 정부와 군부가 일체이면서도 서로 대립된다는 외형을 갖추어 확장되었다. 이는 사적 영속 관계에 있는 모든 군사를 형식적으로나마 일원화된 체계로 파악하려는 집권화 시책의 일단이라 할 수 있다.
삼군부가 점차 비대해지자 고려 이래의 제도를 본받아 군기(軍機) · 군정 · 숙위 · 경비 등을 장악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건국과 동시에 군사 기능을 담당했던 중추원(中樞院)은 사실상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1398년부터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1400년 절제사 등의 사적 영속관계에 있던 사병이 혁파되었고 이에 강력한 집권화 정책의 방향으로 개편이 이루어졌다. 즉 그 해 4월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고 중추원을 완전히 삼군부로 개칭하였다.
이는 삼군부와 중추원이 병치되어 있는 데서 일어나는 군령 · 군정상의 부작용을 없애기 위한 것으로, 최고지휘관인 판삼군부사 · 지삼군부사 등의 관원을 총제(摠制)라고도 하였다. 중추원의 기능이 삼군부로 통합됨에 따라 왕명 출납의 기능은 승정원으로 옮겨갔다. 또한, 삼군부의 요원은 의정부의 구성원이 될 수 없게 하여 정부와 군부가 서로 견제, 대립하는 체제를 갖추게 하였다.
그러나 군령의 체계상으로 보면, 재상이 같은 발병권(發兵權)을 가지는 총제 보다는 상위에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 입각해 의정부는 왕명을 받아 삼군부에 이명(移命)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때의 삼군부를 중 · 좌 · 우의 삼군으로 각각 구분해 위에서 언급된 판사 · 지사 및 동지사 이외에 각 군별로 총제를 두어 소속군을 통할하도록 하였다. 사병이 혁파되고 병권이 집중되어 명(名)과 실(實)을 갖춘 삼군부를 분할 통솔하게 한 것은 병권의 편중을 막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리고 이 때 정상적 · 법제적 기구로 성립되었다.
1401년(태종 1) 7월 삼군부는 승추부(承樞府)로 개편되어 군기와 왕명 출납을 장악하였던 중추원 기능으로 다시 통합되었다. 이후 삼군부의 명칭은 다시 쓰이지 않았으며, 다만 군사력과 연결되는 삼군의 총제를 보강하였다. 승추부는 1403년 6월 삼군에 각각 도총제부를 두어 다시 분리되었다가, 1405년 육조의 지위가 높아지고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병조에 합병되었다.
1409년 병조에 치우쳐 있는 군사관계 업무를 분산시키기 위해 새로이 최고 군령기관으로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를 두어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그러나 곧 의흥부(義興府)로 고쳐 군정은 병조가, 군령은 의흥부가 담당하였다. 1412년 7월 의흥부가 다시 혁파되고 군령 · 군정권이 병조로 넘어갔으나 1414년을 전후로 진무소가 부설되었다. 이에 따라 다시 병조와 군령 · 군정권을 양립하게 되었다.
1418년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면서, 삼군진무소를 의군부진무소로 하고 앞서 세자를 위해 설치했던 의용위(義勇衛)를 삼군진무소라 하였다. 이는 상왕이 된 태종이 병권을 그대로 장악하기 위해 군령권을 양분하는 동시에 형식상으로나마 삼군을 관장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형식상 병권양분 상태로 있던 의군부는 곧 삼군도총제부로 통합되었다. 이로써 병조와 삼군도진무소가 당시의 군령 · 군정계통을 양분하고 있는 상태에서, 삼군도총제부는 십사(十司)의 위에서 지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1432년(세종 14) 3월 삼군도총제부가 혁파되고 중추원이 다시 부설되어 숙위와 경비 등을 맡도록 하였다. 사실상 삼군부의 계통을 이은 삼군진무소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중앙군이 오위체제로 되면서이다.
즉, 1453년(단종 1) 7월 당시 12사(司)로 불어났던 중앙군이 오사(五司)로 되자 삼군은 중군 밑에 삼사를, 좌 · 우군 밑에 각각 1사를 두게 되었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오사가 오위에 병합되어 부대편성과 진법체제가 일치되는 중앙 군제가 확립되면서 삼군이라는 편성은 없어지고 오위진무소로 개칭되었다. 1466년 오위진무소가 오위도총부로 개칭되면서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