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1982. 대구 출신. 서울보정학교(普正學校)를 나와 휘문의숙(徽文義塾)을 다니다 대구로 내려가 계성중학(啓聖中學)에 편입하였다. 4학년 때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밀양 지방의 농촌으로 몸을 피하였다.
밀양에서 대구로 돌아온 그는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1923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 있는 일본영화예술연구소에서 6개월 동안 기초수련을 마친 다음 서울로 돌아왔다.
1927년 미국 할리우드로 가기 위하여 부산에서 화물선 헤이안환(平安丸)을 타고 상해(上海)로 떠났다가 할리우드행을 포기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경도(京都) 신흥(新興)키네마촬영소에 입소, 기초과정에 합격하여 몇 달 동안의 수련 끝에 조감독으로 임명되어 3년 가까이 연출수업을 닦았다.
1932년에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는 「임자 없는 나룻배」를 발표함으로써 영화감독이 되었다. 「임자 없는 나룻배」는 농촌에 철도가 생기면서 나룻배의 사공이 생존권을 빼앗기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지만, 이를 통해 일제의 침략과 새로운 문명의 침투를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줄기찬 민족정신과 차분한 리얼리즘정신을 뒷받침으로 한 우리 영화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어서 그는 「밝아가는 인생」(1933)·「바다여 말하라」(1935)·「이도령」·「무지개」(1936)·「나그네」(1937)·「새출발」(1939)·「돌쇠」(1941) 등의 작품을 만들었으나, 일제 말기에 들어서서 조선총독부의 영화정책 협조요구를 거부하고 영화계를 등지게 된다. 영화계를 떠난 뒤, 강제 징용되어 중노동을 하였으나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다시 영화계로 돌아왔다.
「민족의 새벽」(1947)·「돌아온 어머니」(1949) 등은 광복의 감격을 영상화한 것이다. 「춘향전」(1950)·「심청전」(1956)·「애련의 꽃송이」(1958)·「낙화암과 삼천궁녀」·「천하태평」(1960)·「평양기생 계월향」(1962)·「상처받은 여인」(1963) 등의 작품을 계속 연출한 그는 일생 동안 단순한 오락이나 상업주의적인 영화의 테두리를 벗어나 리얼리즘영화를 우리 영화계에 정착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