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중(衡中). 고려 말의 명신 이색(李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성유후사유후 이종선(李種善)이다. 아버지는 이계정(李季町)이며, 어머니는 사섬시주부 박수량(朴遂良)의 딸이다.
1477년(성종 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토관(檢討官)·시독관(侍讀官)·지평·검상(檢詳)·집의, 내섬시정(內贍寺正), 대사성·부제학·대사간·병조참지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481년에 상평창(常平倉) 설치 논의 시에 창름(倉廩)과 부고(府庫)가 있는 것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 하여 그 방책을 말하였고, 또 성종이 응방(鷹坊)을 혁파하고서도 다시 해동청 등을 진상케 하라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1487년에는 도성의 정업원(淨業院: 몸과 마음을 깨끗이 닦는 불교사원) 폐지와 이사(里社)의 폐단, 승려의 여염(閭閻: 일반 백성들이 사는 곳) 출입 금지 등에 대하여 청하였다.
1493년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 외에 조례(條例)와 교령(敎令)이 번잡하여 다시 속록(續錄)을 편찬하고 수교(讐校: 다른 것과 대조하여 교정함.)하니, 이러한 번잡을 피할 것과, 임금의 도리는 대강(大綱)을 총괄할 뿐 너무 소소한 데 힘써 손상됨이 없어야 한다고 직언하였다.
나아가 1499년(연산군 5)에는 임금이 사냥에만 열중하자 강무(講武)보다는 경연과 시사에 힘쓸 것을 거듭 청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