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심양(瀋陽)에 볼모로 간 봉림대군(鳳林大君:뒤의 효종)을 배종(陪從:임금을 모시고 따라감)한 8장사군관(八壯士軍官), 즉 박배원(朴培元)·신진익(申晉翼)·오효성(吳孝誠)·조양(趙壤)·장애성(張愛聲)·김지웅(金志雄)·박기성(朴起星)·장사민(張士敏) 등의 노고를 생각하여 효종 즉위 초에 설치한 국왕의 소수 정예 친위조직이다.
1656년(효종 7)에 감대청(感戴廳)이라고도 불리는 별군직청(別軍職廳)을 설치하여 이들을 조직적으로 숙위(宿衛)케 하였다. 별군직은 원래 산직(散職)으로 직품(職品)에 대한 구분이 세분화되어 있지 않고, 다만 당상은 첨지 이상, 참상은 주부 이상, 그리고 참하는 부장(部將)에 준하는 위계를 지니고 있었다.
부장으로서 만 20개월이 되거나 과거에 합격하면 6품으로 승진시켰다. 정원은 특별히 정하여져 있지 않은 채 보통 10∼20인 정도를 유지하였으며, 영조 말기에는 무려 30여인까지 되었던 경우도 있었다.
조직은 행수별군직(行首別軍職)과 습행수(習行首)에 의하여 통솔되었으며, 행수는 연장자나 경력 중심으로 선발되었다. 특히 8장사 자손 외에는 무반 청직(淸直:품행이 청렴하고 곧음)인 선전관을 역임하지 않으면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행수의 자격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이들은 급료로써 당상은 쌀 2석(石)과 콩 12두(斗), 당하는 쌀 1석 9두와 콩 9두를 산료(散料:한 해에 춘·하·추·동으로 나누어 주던 녹과를 월별로 주거나 당초 월별로 주던 녹과)로 지급받았다.
대개 이 정도의 급료는 다른 직에 비하여 매우 후한 것이었으며, 이 밖에도 군함록(軍銜祿)을 별도로 지급받았다. 인적 구성은 주로 처음은 무예에 출중한 서북무사(西北武士)나 8장사 자손 중심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중앙 및 지방의 무반 고위직 출신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기능은 국왕의 신변보호를 위한 입직(入直:숙직)·시위(侍衛:임금을 모심)·적간(摘奸:부정이 있나 없나를 살피는 일)의 임무를 두루 수행하였으며, 다른 무변(武弁)들과는 달리 이러한 기능을 초월하는 임무수행 능력을 부여받기도 하였다.
우선, 입직은 국왕에 대한 아침·저녁 문안과 함께 궁중 내외의 이상유무를 보고하는 것이었으며, 3인이 3일간씩 입직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시위는 국왕의 신변보호를 주목적으로 하는 만큼 친림하는 곳의 군병배열 등 일체를 맡아 거행하고 궐내거둥일 때는 4인만 시위하며, 도목정사(都目政事)·문무과전시(文武科殿試) 등 중요행사 및 교외행행(郊外行幸) 때에는 전원이 시위하였다.
적간은 궁중 내 각 처소의 적간임무로부터 경중외(京中外)의 시정(市情), 각 능원(陵園)의 봉심(奉審), 화성(華城)의 수직상황(守直狀況) 및 농사형편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적간하였다.
그 밖에 사신문안사(使臣問安使)·송목개색(松木改色)에 관한 주요 임무 등이 있었다. 별군직의 성격상 주요 행사이기도 한 시사회(試射會)는 정기적으로 매달 행하는 삭시사(朔試射)와 춘추로 행하는 별시사(別試射)가 있었다. 삭시사는 봄철 2∼4월, 가을철 8∼10월에 행하고 별시사는 4월과 10월에 30순(巡)을 시험하였다.
영조의 왕권이 신장되는 1740년(영조 16)을 기점으로 경중(京中:서울 안) 각 군문(軍門)으로의 진출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또, 정조 이전까지만 하여도 특별한 경력이 없이도 바로 별군직에 나아갈 수 있었지만, 정조 이후로는 주로 선전관 및 곤임(閫任:병사·수사의 직임) 또는 한량 출신들 가운데에서 많이 임명되었다.
그만큼 별군직의 자질이 향상되었고, 면직 또한 원칙적으로는 곤임에서 물러나야 하나, 정조 이후 중앙군문으로의 진출과 함께 아장(亞將)에서 면직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별군직의 지위는 정조·순조대를 통하여 급격히 팽창하였으며, 중앙군문을 중심으로는 종2품 이상이, 지방관직에서는 종2·3품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결국 별군직은 국왕의 신변보장은 물론 나아가 왕권강화의 일익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다른 병종(兵種)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분과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무반요직(武班要職)이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세력을 확보한 몇몇 무반 가계들은 대대로 세습체계를 구축하면서 한층 더 성장하고자 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들 무반가 내에서는 중앙관직으로 진출하는 가문과 그렇지 못한 가문이 나눠지게 되면서 무반벌족(武班閥族)으로서의 성장과 도태라는 세력분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후 별군직은 1883년(고종 20)을 전후한 새로운 군제개편으로 변모되기 시작하여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으로 혁파되었다. 이 때 선전관은 우시어(右侍御), 별군직은 좌시어(左侍御)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