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 중학을 졸업한 뒤 연기자가 되려고 당시 현철(玄哲)이 운영하고 있던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하여 연극과 영화에 관한 공부를 하였다.
그 뒤 연극단체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나운규(羅雲奎)프로덕션이 1927년에 창설되자 창립작인 「잘 있거라」에 나운규·전옥(全玉) 등과 출연함으로써 영화계에 등장하게 되었다.
1928년에는 나운규의 성공작 「사랑을 찾아서」에 출연하여 연기를 인정받았으며, 그 뒤로 나운규가 감독한 작품에는 빠짐없이 출연하였다. 1930년에는 「어사 박문수」의 주연과 감독을 맡아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였으나 성과가 좋지 않아 영화작가로의 전향은 좌절되었다.
그 뒤 영화계를 잠시 떠났다가 1936년부터 활동을 재개하여 다시 중후한 역들을 맡았다. 1955년전라남도 소록도에서 홍성기(洪性麒)감독의 「열애(熱愛)」를 촬영하던 도중 작고하였다.
출연한 대표작으로는 「역습」(1936)·「도생록(圖生錄)」(1938)·「국경」(1939)·「수선화」(1940)·「조선해협」(1943)·「새로운 맹서」(1946)·「성불사」(1952) 등이 있으며, 노역(老役)에 뛰어났고 성격배우로서 개성이 강한 연기를 펼쳤다.
그가 죽자 그의 연기생애를 기리기 위하여 영화인들이 발기, 금룡상(錦龍賞)을 제정하여, 비록 1회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영화인에게 시상하기도 하였다.
그는 한국영화 초창기에 윤봉춘(尹逢春)·나운규 등과 함께 연기분야에 있어서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고, 특히 극중 역할을 잘 소화해낸 개성이 뚜렷한 성격배우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