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시에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있으면서 다른 곳으로 피난하여 능침(陵寢)을 잘 수호하지 못하였다고 탄핵을 받았으나, 그 이후로도 진주목사(晉州牧使)·강계부사(江界府使)·평안병사(平安兵使)·이천부사(利川府使)·전라병사·공조참판·수원부사·경상도수사 등을 계속 역임하였다.
특히 평안병사 재직시에는 흉년에 백성들이 월경(越境: 국경을 넘음.)하여 중국인들과 서로 어울릴 염려가 있다고 하여, 이들을 호령이나 위엄으로 제어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조정의 선처가 있어야 된다고 치계(馳啓: 급하게 왕에게 아뢰는 일)하였다.
1603년(선조 36) 부호군(副護軍)으로 비변사당상이 되어 남한산성의 형세를 살펴보고 그 도형을 그렸으며, 이어 죽주산성(竹州山城)의 형세를 살펴 보고하기도 하였다. 방어사(防禦使)·통제사(統制使)를 거쳐 1611년(광해군 3) 제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이 때 왜적을 잡은 공로로 상전(賞典)을 받았는데, 뒤에 이들은 왜적이 아니라 표류하던 남경(南京)·안남(安南)의 장사치라는 주장이 있어서 탄핵을 당하고 북청(北靑)으로 귀양갔다.
1619년(광해군 11)에 무반 중에서 경력과 신망이 있다 하여 다시 평안도순변사(平安道巡邊使)를 제수받았고, 1624년(인조 2)에는 함경북도병사로서 북방 오랑캐에 대비한 육진(六鎭)의 군비책을 주장하였으며, 그 직임 중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