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빈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후기 제주목사, 평안도순변사, 함경북도병사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응열(應說)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3년(명종 18)
사망 연도
1625년(인조 3)
주요 관직
광주목사(廣州牧使)|수원부사|경상도수사|함경북도병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조선후기 제주목사, 평안도순변사, 함경북도병사 등을 역임한 무신.
생애 및 활동사항

임진왜란시에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있으면서 다른 곳으로 피난하여 능침(陵寢)을 잘 수호하지 못하였다고 탄핵을 받았으나, 그 이후로도 진주목사(晉州牧使)·강계부사(江界府使)·평안병사(平安兵使)·이천부사(利川府使)·전라병사·공조참판·수원부사·경상도수사 등을 계속 역임하였다.

특히 평안병사 재직시에는 흉년에 백성들이 월경(越境: 국경을 넘음.)하여 중국인들과 서로 어울릴 염려가 있다고 하여, 이들을 호령이나 위엄으로 제어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조정의 선처가 있어야 된다고 치계(馳啓: 급하게 왕에게 아뢰는 일)하였다.

1603년(선조 36) 부호군(副護軍)으로 비변사당상이 되어 남한산성의 형세를 살펴보고 그 도형을 그렸으며, 이어 죽주산성(竹州山城)의 형세를 살펴 보고하기도 하였다. 방어사(防禦使)·통제사(統制使)를 거쳐 1611년(광해군 3) 제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이 때 왜적을 잡은 공로로 상전(賞典)을 받았는데, 뒤에 이들은 왜적이 아니라 표류하던 남경(南京)·안남(安南)의 장사치라는 주장이 있어서 탄핵을 당하고 북청(北靑)으로 귀양갔다.

1619년(광해군 11)에 무반 중에서 경력과 신망이 있다 하여 다시 평안도순변사(平安道巡邊使)를 제수받았고, 1624년(인조 2)에는 함경북도병사로서 북방 오랑캐에 대비한 육진(六鎭)의 군비책을 주장하였으며, 그 직임 중에 죽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