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지(得之). 판중추부사 이세좌(李世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찬 이수정(李守貞)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고, 어머니는 김양진(金楊震)의 딸이다. 이유경(李有慶)에게 입양되었다.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장령·사인(舍人)·사간·우승지·좌승지·참찬관·형조참의 등의 관직을 지내고, 1575년(선조 8) 홍문록(弘文錄)에 간택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성주목사(星州牧使)였던 이덕열은 성주 성내에 왜적이 웅거하고 있는데도, 지경을 떠나지 않고 굳게 지키면서 도망한 군사들을 수습해 적을 토벌하였다.
1593년 장령이 되어서는 사은사(謝恩使) 정철(鄭澈) 등이 전대(專對: 왕을 홀로 대좌해 자신의 견해를 전함)의 임무를 받고 남은 왜적이 없다는 설을 힘껏 변명하지 못한 데 대해 탄핵하기도 하였다. 또 선조(宣祖)가 선위(禪位)의 뜻을 내놓자 극구 불가함을 피력하였다.
좌부승지가 되어 명나라 장수 유총병(劉摠兵)에게 연향(燕享)하는 일로 호남에 다녀오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진주·경주 등지에서 싸우다 죽은 명나라 군사의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 옳다고 청하였다.
1598년(선조 31) 명나라 장수 이여매(李如梅)의 접반사(接伴使)로서 시종 배행(陪行: 함께 따라 다님.)해 울산(蔚山)에서의 승전보를 급히 전하였다.
1599년 동지사(冬至使)로 중국에 가면서 오랑캐에 대비해 많은 군관(軍官)을 데려갈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이는 마침 겨울철인데다가 달자(韃子)들의 노략질이 심해져 방물(方物)과 공마(貢馬)를 보호할 군관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