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경렬(景烈). 아버지는 첨정 이극(李克)이다.
20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고, 왜병의 동향을 탐지하는 일을 맡았다가 특지(特旨)로 홍양통판(洪陽通判)에 올라 군비를 강화하고 백성을 안무(按撫)하였다.
1597년에 남원판관이 되었는데, 그 해 정유재란이 일어나 남원이 왜병들에 의하여 포위되자 명나라 부총병(副摠兵) 양원(楊元), 남원부사 임현(任鉉) 등과 함께 남원을 수비하고, 적을 기습하여 무기고를 불사르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왜병이 늘어나 전세가 위급해지자 양원은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으나, 이덕회 등은 끝까지 분전하다가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병사 이복남(李福男), 부사 임현 등 50여 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남원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