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8년(선조 31)에 임진왜란으로 피란갔던 성천(成川)에서 선조의 서(庶) 5남인 정원군( 원종으로 추숭)과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훗날 인헌왕후로 추숭)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656년(효종 7) 59세로 사망하였다. 자는 경숙(敬叔), 시호는 정효(貞孝), 군호는 능원대군(綾原大君)이다. 형제는 형 인조(仁祖), 아우 능창대군(綾昌大君) 전(佺)이 있다.
1611년(광해군 3) 14세 때 할머니 인빈김씨의 뜻에 따라 선조의 서 3남인 의안군 성(珹)의 양자로 출계되었고, 이해 능원군(綾原君)이란 군호를 받았다. 그후 1632년(인조 10)에 아버지가 원종으로 추숭되자, 그의 군호도 능원군에서 능원대군으로 승격되었다.
류효립(柳孝立)의 딸과 혼인하여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요절하여 후사가 없다. 측실 김만성(金晩成)의 딸에게서 5남 3녀를 두었다. 세 딸 중에 서 1녀 이영정(李英淨)은 어려서 사망하였다. 서 1남은 영풍군(靈豊君) 식(㵓), 서 2남은 영은군(靈恩君) 함(涵), 서 3남은 영신군(靈愼君) 형(瀅), 서 4남은 영춘군(靈春君) 정(涏), 서 5남은 영순군(靈順君) 유(浟)이다. 서 2녀 이영숙(李英淑)은 현감 유수창(柳壽昌), 서 3녀 이영순(李英順)은 유성삼(柳省三)과 혼인하였다.
광해군 대 이보의 행적은 1617년(광해군 9) 관료와 종친이 인목대비의 폐비를 논의할 때의 기록뿐이다. 반정으로 형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왕실 시위, 종친 관리와 관련된 직임을 맡았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에 관료들과 함께 인목대비와 중전을 호종하였으며, 1632년(인조 10) 대군으로 승격된 이후에는 종친부 유사 당상을 맡았다. 병자호란 당시 임금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는데, 청에 항복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1639~1644년(인조 22) 약 5년간 종부시 도제조를 지내며 종친을 관리하였다. 그러나 1626년에 의안군의 종으로 면천된 정영신에게 지나치게 태형을 가해 죽게 한 일, 1649년에 각도에서 바치는 말을 방납(防納)하고 말 값을 많이 거둔 일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