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부 ()

목차
관련 정보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종실제군(宗室諸君)의 일을 관장한 관서.
제도/관청
설치 시기
1430년(세종 12)
폐지 시기
1894년(고종 31)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종친부(宗親府)는 조선시대 종실제군(宗室諸君)의 일을 관장하던 관서이다. 조선 초 재내제군소를 설치하여 종친을 소속시켰다. 1428년 재내제군소는 부(府)로 승격되었다가 1430년 종친부로 개칭되었다. 종친부는 종친과 부중 사무를 관장할 동반직으로 구성되며, 종친은 왕자군으로부터 정6품 종반직을 제수받았고, 동반직은 전첨과 부전첨이 있었다. 종친은 지위에 따라 종반직에 봉작되었으나, 총괄 책임자가 없어 비공식적으로 유사당상을 두었다. 17세기 이후 종친의 수가 감소하여 명백을 이어 가다가 고종 때에 관제가 크게 변화되었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종실제군(宗室諸君)의 일을 관장한 관서.
# 내용

종친부의 전신은 고려의 제왕자부(諸王子府)와 조선 초의 재내제군소(在內諸君所)이다. 제왕자부의 설치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문종 때부터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 뒤 변동이 없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1392년(태조 1) 7월의 신관제 반포 때 제왕자부가 재내제군소로 명칭이 바뀌었다. 재내제군소가 고려의 제왕자부와 다른 점은 제군이 개별적으로 개부(開府)하던 것을 하나로 통합한 데 있다. 관사를 단일화하고 난 후, 종친의 지변(知辨)의 어려움을 감안해 전중시(殿中寺)의 기능을 강화, 전내급사(殿內給事)의 일을 첨가하였다. 대신 요속(僚屬)을 두지 않게 되어 기구가 축소되어 공식관제에서 제외되었다.

재내제군소는 1414년(태종 14) 2월 전중시를 고친 종부시(宗府寺)를 예속시켜 대군(大君)도제조(都提調)로, 정윤(正尹) 이하를 제거(提擧)로 하고, 재내제군의 지변을 종부시에 맡기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재내제군소의 기능을 강화하고 종부시에서 종친의 비위 조사를 전담하게 함으로써 종친이 죄를 범했을 때 대간(臺諫)의 집요한 논핵(論劾)을 피하는 동시에, 종친의 권위 수호에 대한 안전판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지만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재내제군소는 같은 해 6월에 다시 부(府)로 승격되었다.

1428년(세종 10) 10월 송제(宋制)를 따라 종부시가 재내제군소에서 분리되어 독립 아문이 되면서 종친의 비위 규찰을 정식으로 관장하였다. 그런데 종부시의 분리 독립으로 재내제군부는 다시 원래의 무아문(無衙門)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는 곧 모순이 드러나 1430년(세종 12) 11월에 관인을 두고 종친부라 개칭하는 동시에, 왕족은 고려시대부터 작록만 주고 사관(仕官)은 원칙적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비록 실권은 없으나 같은 정1품 아문인 의정부보다 서열이 높은 최고 아문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뒤에 『대전회통』에서 규정한 무품아문(無品衙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종친부에는 전첨사(典籤司)를 두어 관원으로 전첨(典籤) 1인, 부전첨(副典籤) 1명, 녹사(錄事) 1명, 부녹사(副錄事) 1인을 두고 부중(府中)의 잡무를 관장하였는데, 전첨과 부전첨은 다른 관청의 실직 관원의 겸임직이며, 녹사와 부녹사는 공신동감의 승과 녹사가 겸임하였다. 이로써, 종부시는 종친의 규찰과 『선원보첩 璿源譜牒』의 편찬을, 종친부의 전첨사는 부중의 잡무, 즉 종친의 지변을 맡게 되었다.

『경국대전』의 종친부의 직제를 보면, 종친의 정원은 없다고 규정하였다. 종반계는 정1품 현록대부(顯祿大夫) · 흥록대부(興祿大夫)에서 정6품인 집순랑(執順郎) · 종순랑(從順郎)까지이고, 작직(爵職)은 무품(無品) 무자(無資)의 대군에서 정6품 감(監)까지로 나누고, 부중 잡무를 맡은 조관(朝官)은 전첨 1인, 전부(典簿) 1인이다. 조관 인원은 세종 때 4인에서 2인으로 줄었다. 종친부에는 종친의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종반직의 구분만 있을 뿐이었다. 조선 초기 재내제군소일 당시에는 도제조 · 제조 · 제거를 두어서 종친을 관할할 수 있는 직임을 두었는데, 종친부에는 법제적으로 총괄할 직임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종친부에 소속된 2품 이상의 종친 가운데 3명을 선택하여 유사당상이라고 칭하였다. 이들은 종친부의 대표로서 국왕이 내린 명령을 수행하고 종친 봉작을 관장하는데, 유사당상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왕자인 대군과군, 2품 이상의 군 즉, 왕세자의 중손(衆孫), 대군 · 군의 중자(衆子), 승습 적장 증손이다. 그 이외의 종친이라도 승진되어 2품 이상의 군이 되면 유사당상이 될 수 있다.

종친부의 기능과 종친의 작계(爵階)는 고종 때에 크게 변화되었다. 17세기 이후로 종친의 수가 감소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순조 대에는 종반직 대상이 전무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친부는 거의 명맥만 이어 가다가 헌종 때에 흥선군이 유사당상이 되면서 재정비를 하기 시작했다. 흥선군은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종친부 재정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1864년(고종 1) 종부시를 종친부에 통합하여 열성(列聖)의 어보(御譜) · 어진(御眞)을 받들고 선원제파(璿源諸派)를 관장했으며, 상의원(尙衣院)의 기능 일부를 계승해 양궁(兩宮)의 의대봉진(衣帶封進)을 담당하였다. 이듬해인 1865년에는 종친부 관제를 개정하였고, 1879년(고종 6)에 개정된 종친 관제를 반영한 『종부조례』의 종친부 관제는 다시 크게 변화되었다. 종친부에 영종정경(領宗正卿) · 판종정경(判宗正卿) · 지종정경(知宗正卿) · 종정경(宗正卿)의 직이 새로 생겨서 영종정경은 대군과 왕자군이 차례로 겸하고, 종정경은 제군 및 종성조관(宗姓朝官) 2품 이상이 계차(啓差)하였다. 조관은 전첨과 전부는 전과 같았으나 주부와 직장(直長) 1인은 종부시에서 옮겨 두고 참봉 1인을 더 두었다. 『종부조례』의 종친부 관제 특장은 종친 관제였는데, 당하관 종반직이 폐지되었다. 이것은 종친의 과거 응시와 관직 진출을 허용한 결과이다. 또한 종친부 모든 동반직은 자벽제로 운영하도록 규정되었다. 갑오경장 이후 종친부는 종정부(宗正府) · 종정사(宗正司) · 종정원(宗正院) · 종부시(宗簿寺) 등으로 바뀌며, 기능과 직제도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
『고려사절요』
『태종실록』
『세종실록』
『세조실록』
『성종실록』
『경국대전』
『속대전』
『대전회통』
『유전조례』
『증보문헌비고』
『익재집(益齋集)』

논문

강제훈, 「조선초기 종친직제의 정비와 운영」(『한국사연구』 151, 한국사연구회, 2010)
김성준, 「종친부고」(『사학연구』 18, 한국사학회, 1964)
원창애, 「조선 종친부의 체제 및 기능과 그 변천」(『사학연구』 114, 한국사학회, 2011)
관련 미디어 (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