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수초(遂初). 이일영(李日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이선제(李先齊)이다. 아버지는 헌납(獻納) 이시원(李始元)이며, 어머니는 김승손(金承孫)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96년(연산군 2) 폐비 윤씨(尹氏)의 사당(祠堂)과 신주(神主) 문제에 대하여 서계(書啓)하기를, 폐비가 이미 종묘(宗廟)와는 끊어졌으니 사은(謝恩)으로서 예를 어길 수 없다 하고 신주와 사당을 세우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사당과 신주를 세워 종묘와 같게 하자 이를 “예(禮)라 할 수 없고, 효(孝)라 할 수 없다.”고 그 불가함을 거듭 상소하였다. 예조참의·대사간을 거쳐 1497년에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 때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인한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반신(叛臣)의 율에 따라 논단해야 한다’고 논의하였다.
1499년 서쪽 변방의 여진족이 변경을 침범하여 그 정벌에 대한 가부를 물으니, 근래 흉년이라 풍년들기를 기다려야 하며 변경의 장성(長城)은 각 백성들의 힘을 돌아가며 사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502년(연산군 8) 강원도 관찰사로서 그 계문(啓聞)에 농사가 잘되었음을 치계하다가, 아첨이 지나치다는 탄핵을 받고 1504년 의금부에서 병사하였다. 이에 죄와 벌을 논하기도 전에 죽었다 하여 이복선의 모든 직첩(職牒: 관원의 임명사령장)을 거둘 것과 그 자식은 출성(出城)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