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선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예조참의,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수초(遂初)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504년(연산군 10)
본관
광주(光州)
주요 관직
예조참의|대사간|이조참의
관련 사건
무오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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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예조참의,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수초(遂初). 이일영(李日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이선제(李先齊)이다. 아버지는 헌납(獻納) 이시원(李始元)이며, 어머니는 김승손(金承孫)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96년(연산군 2) 폐비 윤씨(尹氏)의 사당(祠堂)과 신주(神主) 문제에 대하여 서계(書啓)하기를, 폐비가 이미 종묘(宗廟)와는 끊어졌으니 사은(謝恩)으로서 예를 어길 수 없다 하고 신주와 사당을 세우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사당과 신주를 세워 종묘와 같게 하자 이를 “예(禮)라 할 수 없고, 효(孝)라 할 수 없다.”고 그 불가함을 거듭 상소하였다. 예조참의·대사간을 거쳐 1497년에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 때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인한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반신(叛臣)의 율에 따라 논단해야 한다’고 논의하였다.

1499년 서쪽 변방의 여진족이 변경을 침범하여 그 정벌에 대한 가부를 물으니, 근래 흉년이라 풍년들기를 기다려야 하며 변경의 장성(長城)은 각 백성들의 힘을 돌아가며 사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502년(연산군 8) 강원도 관찰사로서 그 계문(啓聞)에 농사가 잘되었음을 치계하다가, 아첨이 지나치다는 탄핵을 받고 1504년 의금부에서 병사하였다. 이에 죄와 벌을 논하기도 전에 죽었다 하여 이복선의 모든 직첩(職牒: 관원의 임명사령장)을 거둘 것과 그 자식은 출성(出城)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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