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사휘(士輝). 이형(李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동백(李東白)이고, 아버지는 이보(李誧)이다.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설서·지평·정언·장령·집의·헌납·사간·보덕·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719년(숙종 45)에 집의로서 관소(館所)의 예를 다툰 승선(承宣) 조명봉(趙鳴鳳)·궁관(宮官) 박성로(朴聖輅)·홍용조(洪龍祚) 및 역관(譯官) 등을 엄히 다스리도록 청하고, 헌납이 되어서는 경리청(經理廳)의 폐해를 들어 혁파론을 상소하여 조정논의를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또 승정원 규례에 따라 전지(傳旨)를 받지 않은 비국낭청(備局郎廳)을 파직하도록 청하였는데, 이를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오히려 임용하자 이에 대한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또 승정원에 내린 비망기(備忘記: 왕이 몰래 내리는 명령) 중에 도리에 어긋남이 있다 하여 이를 도로 거두도록 직소하기도 하였다.
그 뒤 예조참판·안동부사·강릉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에는 어영청(御營廳)의 군수(軍需)를 탕감한 어영대장 이삼(李森)을 치죄하도록 상소하였는데, 이는 대개 이삼이 김일경(金一鏡)의 당여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좌의정 유봉휘(柳鳳輝)·이사상(李師尙)·김창집 등의 징벌을 주창하여, 김창집 등은 정계(停啓)되고 이사상은 정배(定配)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