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신보(愼甫). 군수 이수(李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갱생(李更生)이다. 아버지는 이명하(李鳴夏)이며, 어머니는 성여관(成汝寬)의 딸이다. 송준길(宋俊吉)의 문인(門人)이다.
1675년(숙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지평·헌납, 영천군수·경상우도암행어사·경상감사, 승지, 황해감사·평안감사·함경감사, 도승지, 강화유수·경기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1682년(숙종 8) 수원부사로 있으면서 스승인 송준길이 관작을 추탈당하자, 그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신변(伸辯)의 소(疏)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비방을 받았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송시열(宋時烈)·김익훈(金益勳)의 당으로 지목되어 창성(昌城)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98년 승지로 있을 당시 유망(流亡)하는 백성들의 안집책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며, 1701년에는 마천령(摩天嶺)·철령(鐵嶺)·성진(成津) 등을 요새화하여 북방수비에도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1702년(숙종 28) 강화유수로서 강화 토성(土城)의 개수(改修) 문제를 건의하여 갑곶진(甲串津)의 석성(石城)을 보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알성시(謁聖試)의 시관이 되어, 사위인 김만근(金萬謹) 등이 급제된 일로 지방 유생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