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노수(魯叟). 이문백(李文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흡(李潝)이다. 아버지는 이의명(李倚明)이며, 어머니는 박진동(朴鎭東)의 딸이다.
1752년(영조 2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지평·정언·장령·문천군수(文川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772년(영조 48) 장령으로 있을 당시 삼수부(三水府)의 피폐함과 월경채삼(越境採蔘: 국경을 넘어 인삼을 캐는 일)하는 백성들의 폐단을 논하면서, 이를 침탈하는 이서(吏胥)들을 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또 수령은 형편과 등급에 따라 흉년의 재급(災給: 재난에 대한 등급에 따라 물품을 지급함.)을 균분해야 하는데, 단지 친소(親疎)를 좇아서 봉공(奉公)을 사사로이 이용한다고 그 폐해를 지적하였다.
1786년(정조 10)에는 중국의 밀무역이 행하여지는 북관(北關)을 넘나드는 문제를 상소하면서, 진보(鎭堡)의 장교와 병사들이 오로지 채삼(採蔘)하고 사냥하는 일에 골몰하여 국경을 넘나드는 폐단 및 전선(戰船)은 반드시 연해안에 설치하여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바로 출동할 수 있도록 계책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토산물의 진상(進上) 문제와 역참(驛站)노비의 누적(漏籍: 노비대장에 빠져 있음.)에 대한 폐단 등을 상소하여 대간으로서 민생과 관방(關防)·변경 문제 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