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백소(伯邵). 형조참판 이후산(李後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이사경(李士慶)이다. 아버지는 이두악(李斗岳)이며, 어머니는 이상진(李尙眞)의 딸이다.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설서를 거쳐 사서(司書)가 되어서는 왕세자의 성학(聖學)의 발전과 임금이 솔선수범하여 학문적 교훈을 실천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1712년(숙종 38)에는 지평으로서 같은 소론인 이돈(李墩)이 조태채(趙泰采)의 일로 억울함을 당했다고 논하다가 도리어 노론의 미움을 사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1717년(숙종 43) 스승인 윤증(尹拯) 부자의 신원(伸寃)을 1만 여 마디나 되는 장문으로 상소했다가, 금령을 어겼다 하여 강진현(康津縣) 고금도(古今島)에 다시 유배되었다.
이 때 올린 소의 내용은 노론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윤증이 송시열(宋時烈)과 교분을 끊은 것은 “편지 끝에 그의 아버지인 선거(宣擧)를 욕한 것 때문이지 제문(祭文)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송시열을 낱낱이 헐뜯어서 노론측의 강한 반발을 샀던 것이다.
그 뒤 1722년(경종 2)에 다시 상소하기를, 윤증 부자의 죄상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날조하여 위판(位版: 神位를 모시는 位牌)을 철훼하고 끝내 추삭하여, 소장(疏章)은 물론 중외의 소송도 막아 죽은 뒤에도 혹독한 무고의 혐의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이 같은 상소가 있고 난 뒤 노론 정세 하에서 아들 이구응(李龜應)은 특별히 녹용(錄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손자 이재신(李在臣)은 섭기주(攝記注)에 수망(首望: 제1위의 후보자)되었으면서도 사문난적(斯文亂賊)의 후손이라 하여 배척당하였다. 관작에 나간 뒤에 문학·정언·지평·직장·수찬·검상·사간·집의·교리·보덕 등의 청직(淸職)을 역임하였다.